바람이 불면, 꽃 한 다발은 흩날린다. 뜨겁게 우려도, 꽃 한 잎은 여전히 그 색이 희다. 캐모마일이라는 꽃은 그 자체가 매우 작은 존재이니, 많다고 해서 가치가 올라가지 않고 색이 희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고작 꽃 한 송이. 한 송이 정도라면 바람이 불어도 여의치 않고 뜨겁게 우리면 천천히 물드는 것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뜨겁게 데운 레드와인이 가끔 생각나곤 했다. 와인의 바디감이니 산도니 하는 것보다는, 와인의 묵직함과 달달한 맛을 좋아한다. 술이야 차갑게 마시는 게 목 넘김이 좋다지만, 나는 그 좋다는 찬 술보다는, 오히려 추운 겨울에 마시는 뜨거운 술이 좋다. 호호 불면서 마시는 술에는 취기를 천천히 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어느 뜨거운 것이 심장에서 머리로 올라간다. 나는 생각이 많은 탓에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며 마시는 차도 오직 캐모마일이었는데, 내가 술을 마시든 차를 마시든 결국 똑같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거라며, 심장을 느리게 뛰게 해서 여유로워지는 거라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던 당신이 생각난다.
당신이 좋아하는 계절을 나는 사랑한다. 당신은 겨울을 좋아하고, 왜 겨울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이른 아침 어두운 하늘과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의 색이 좋다고 했던, 그곳에서 나오는 향이 좋다고 했던 당신. 나도 참.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으면서 정말 좋아하는구나 느꼈던, 오히려 좋아하는 게 투명해서 부러웠던 당신을 보며 나는 한동안 겨울 하늘을 보곤 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꼭 겨울이 오기를 바랐던 당신에게, 봄이 온다면 오히려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당신에게, 나는 일부러 모든 계절에 겨울을 보여줬다. 눈의 사진과 겨울의 노래와 차가운 온도까지. 그게 고작 '겨울'이라는 한 단어라도. 그럼 당신이 좋아할까 봐. 더 이상 겨울이 언제 오나 슬퍼하지 않을까 봐. 덕분에 나도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겨울이 좋아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서를 대신 쓰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내가 읊조리는 말 한마디도 당신은 감정 없이 꾹꾹 담고 있을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당신 마음대로 해석해 캐모마일 한 잎과도 같다고 할까.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데, 그 잎은 계절을 맘껏 타다가 언젠가 당신 와인에 폭 올라오는 걸까.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하지 않은가. 그러면 캐모마일도, 그것도 당신에겐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눈이 내리는 날엔, 그것도 나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죽어서도 무언가에 취하고 싶으면서 차분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뜨거운 와인 한 잔에 캐모마일 한 송이를 살포시 올려두는 것처럼. 이걸로 충분하다고 해줘. 독특하다고 하면 그것도 당신이 보는 내 모습일 테니, 그 기억마저 살포시 올려두면 좋겠어. 당신에게 추억을 만들어준 내가 이젠 당신의 추억이 되었으니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언젠가 만날 거라며 겨울처럼 차가운 병상 위에서도 따뜻한 손 잡아줬던 것을 죽을 때까지 기억할게.
눈앞의 기울어진 꽃을 보며 내가 지금까지 좋아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때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보다 오히려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찬 때와 같은 순간일 거다.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다면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진 않았겠지. 죽음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걸 테니. 인생은 언제나 한 번 뿐이라던 당신의 말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매일 사는 것이고, 죽는 순간이 단 한 번뿐인 거다. 이제 시간이 점점 다 와가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상상해 볼까. 코가 뜨거워진다. 울지 않는다는 약속은 욕심이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만 어기는 순간이 있어야 약속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나에게 없으니 나를 혼낼 사람은 없다. 모두가 천국에 가고 싶어 하고 동경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곳에 간다면, 당신도 그럴 거라 믿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곳에 더 가고 싶어 질 거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으니.
당신에게 고마웠고, 당신에게 미안했고, 당신을 애정했으며, 끝까지 사랑했다. 나는 이제 곧 겨울이 된다.
-끝-
나는 왜 이런 글을 당신 앞에서 써야 하는가. 눈물로 번지는 글은 무슨 소용인가. 당신의 마지막 부탁이라지만, 곧 혼자 남을 나에겐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당신이 밉다. 당신이 싫다. 그래도 당신에게 고마웠고, 미안했고 애정했으며, 나도 당신을 끝까지 사랑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