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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Sep 28. 2022

시월의 초

 

 초가을의 바람에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촛불은 시월이 되어서도 여즉 타고 있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며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불씨는 구월에서 넘어와 이제 곧 꺼지겠구나 싶었지만, 그것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온온하고 따듯해지는 것이었다. 촛불 안에 담겨있던 따스함 덕에 내 마음이 살짝 녹았고 나는 그 온도가 마음에 들어 구태여 그것을 시월의 초라고 이름 지었다.


 바닷가 앞에 있던 친척집에는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 4명 정도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텅 비어있지만 그만큼 아늑하고 고즈넉했던 곳. 천장엔 전등이 없어 늘 후레시를 가져가야 했고 가끔 배터리를 몰래 숨긴 날에는 양초를 대신 들고 가기도 했다. 나는 양초의 그 은은한 냄새와 불씨를 좋아했다. 다락방의 천장은 꽤나 높아 보였지만 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 불씨가 그 방을 가득 채웠다. 아니, 오히려 텅 비어있던 것들이 초로 빨려 들어갔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무언가에 가득 찬 느낌을 다락방은 오랜만에 느꼈을 테니까.


 네 명이 쭈그려 앉아 얇은 이불 하나 덮고 떠들었던 그 다락방. 무서운 이야기부터 친구들이랑 먹었던 떡볶이, 옆집에 살고 있는 강아지의 똥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로 꽉꽉 채워졌을 때, 누군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친척 누나의 짝사랑이었다. 누나는 짝꿍을 좋아했다. 그 애는 왜 자기 맘을 모르냐며, 꼭 티를 내야 아는 거냐고 구시렁거렸다. 나는 그 사람이 왜 좋냐고 물어봤다. 좋아하는 이유? 그런 거 없다. 그냥 좋아,라고 대답했던 누나. 사랑에 대해 무지했지만 정말 궁금해 다시 물었던 질문. 정말 이유가 없어? 다시 누나의 대답.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좋아.


 좋아하는 것의 이유라. 나는 3살짜리 아기에게 웃는 법을 배웠고,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에겐 애정을 배웠다. 그런데 이젠 중학교에 들어간 누나에게 일방적 사랑을 배우는 건가. 누나는 그걸 스스로 터득한 걸까.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랑한다는 느낌을 어떻게 알아낸 걸까. 그러면 나는 너무 부럽기도 했을 거다. 나도 첫사랑을 직접 느끼고 싶었으니까. 조용해진 방안에 고요한 무언가가 들어온듯한 기분이다. 작은 촛불로 가득 채웠던 그 다락방에 비집고 들어간 마음은 아마 이유 없는 사랑이었겠고 그게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했던 나는 촛불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모두가 잠든 시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보일 듯 말 듯한 무늬에 손가락으로 줄을 긋는다. 한 획을 그으며 사랑은 보이는 걸까, 또 한 획에 사랑은 들리는 걸까, 하며 몇 번의 줄을 그었을 때 나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아, 사랑은 느끼는 걸까.

불씨처럼 마음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는 너무 떨린 나머지 이러다간 잠들지 못할 것 같아서 겉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나오니 느껴지는 가을바람. 새벽의 바람은 차분했다. 메뚜기 소리인지 귀뚜라미 소리인지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좋았고 하늘에 떠있는 별은 아름다웠다. 어딘가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는 아마 구월로부터 바람을 타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 냄새는 시골 흙냄새인지, 바다 냄새인지 살짝 비릿한 것도 같았다. 나는 문 옆에 있던 양초가 보여 불을 켰다. 바람이 불어 금방 꺼질듯한 촛불도 사실은 바람이 있어야 탈 수 있는 게 아닌가. 사르르 떠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더 오래 타고 싶은 마음이, 더 오래 따듯해지고 싶은 마음이 녹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날은 아마 시월의 초였을 것이고 시월이 왔다는 건 가을이 왔다는 것이고 가을이 왔다는 건 곧 겨울이 오겠다는 의미일 테니까. 아마 촛불도 그걸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 따듯해지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야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바람 맛을 한껏 느껴 볼 테니.


 나는 내 마음을 여기저기 주물럭 거리다가 꼭 듣고 싶은 말이 떠올라 누나를 깨웠다. 비몽사몽 했던 누나에게 나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얼른 나와보라고 했다. 내가 굳이 누나를 불렀던 이유는 지금 당장 사랑이 가장 많을 것 같은 사람, 그러니까 가장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을 할 것 같은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나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한 뒤 지금 들리는 게 어떤 소리냐고 물었다. 벌레들의 울음소리라고 했다. 그럼 냄새는 어떻냐고 물었다. 시골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같은 냄새를 맡는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는다. 사랑이 뭐냐. 누나 사랑이 뭐야? 누나는 씩 웃더니 말한다. 사랑? 그건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 애가 생각나네.


 사랑이라. 어릴 적엔 참 물질적인 거라 생각했는데. 꼭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마음이 놓이는 순간 떠오르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란 걸 시월의 어느 가을밤, 분분한 바람을 맞으며 알게 됐다.

촛불을 번쩍 들어 달을 가렸다. 달은 촛불에 타는 것처럼 보였고, 연기는 구름이 되어 넓게 퍼지는 것 같았다. 달이 구워지는 냄새는 어떨까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가렸던 달을 다시 봤을 땐, 왜인지 더 선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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