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evertheless Mar 18. 2020

연애는 못하는 게 아닐지도.

그대 나와 같다면 외쳐라.  " "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다.


연애라 지칭되는 행위를 멈춘지 어느덧 4계절이 두 바퀴를 돌고 돌아 다시 시작되었다. 연애시절 그 순간의 관계가 사랑이었지는에 대한 의문만이 잔여물처럼 남아 있는 지금.


연애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여전히 내가 나를 모르겠는, 너를 몰랐었던 하루가 보태져 그 시절의 어느 지점에 나는 그저 고여있을 뿐. 정체돼있다. 사는 게 빡빡하다는 이유가 핑계로 둔갑되어 단절된 나는 스스로 거울 앞에 서길 꺼리는 사람이 된 듯하다.


거울 앞의 내 모습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애써 웃음 짓는 미소 속엔 좌우로 반전된 얼굴이 아닌 상하로 반전된 표정이 보인다. 열렬히 사랑을 원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루어낼 기미가 당최 보이질 않는다. 횟수 채우기의 반복  그 반복적인 만남에서 느낀 감정들. 또 다른 반복의 시작이 두렵다.


과거를 채우는 기억들에게 묻는다. 기억은 내게 말한다. 상황이 짜증이 난다. 그 애가 그립다. 더 잘해볼걸 그 행동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그 애는 못됐어. 미안해. 처럼 수많은 문장들이 공허하게 나를 또 한 번 괴롭힌다.


아니야 아니야 잡생각은 집어치우자.


어김없이 이 찰나가 끝날 때쯤 드는 생각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로 정리된다. 끝난 일이며 과거다. 그곳에 머물러있기엔 오늘 하루도 망칠 것만 같기에 머릿속에 가득한 잡념을 얼른 없애려 지금 순간의 행위에 집중한다. 일을 하고 깨작깨작 밥술을 뜨고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을 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가는 중이지만 고독만이 나의 벗이 되어 고립을 부추긴다.


그런 감정으로 살아간다. 외롭다.


.

.

.


그러다 오랜만에 오랜 친구 “식”이를 만날 일을 핑계 삼아 만들었다.



“식아 요즘 별일 없었냐.”

“별일? 별일 없지.”

“그렇구나”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역시나 별일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별일이 있지만 늘 없다고 말한 뒤 말을 이어가는데 애써 그 문장이 오고 가야 대화가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버릇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까? 의심한 나는 사람들에게 요즘 “별일 있었고?”라고 뒤집어 물어본다.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별일은 없다고 말한 뒤  별일의 관한 이야기가 입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저 마음을 어디까지 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인가를 판단하는 잠깐의 숨 고름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 수동적으로 배운 “ 하와유?” “아임 파인땡큐” “앤 유?” 같은 말인 것이다. 의미가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는.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별일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곧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아 적당한 위로를 건네다 일어난 상황이었다.


통칭 찡찡이라고 칭하겠다.


찡찡이는 결혼 준비로 인한 스트레스와 투입되는 비용, 회사일 등등 자신의 여러 고민 등을 털어놨고 적당한 위로를 건네던 식이가 오히려 짜증이 났는데 그 멘트가 참으로 가관이다.


“그래도 부모님이 5억짜리 집은 해주셨어”


5억이라는 단어는 식이와 내가 견뎌야 하는 무게의 치사량을 아득하니 웃도는 금액이었다.


찡찡이는 찡찡이의 삶만을 살아왔기에 다른 사람의 구성요소를 알지 못한다. 그 말은 가진 게 많지 않고 꽤, 적당히 많아서 불행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야기는 또 다른 상황과 이어졌다. 식이 다른 친구에게 말한 고민. 햇수로 5년이 넘어가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의 작고 소소한 문제들을 통칭 "호쾌한"에게 털어놓은 일화였다.


“쾌환아 연애라는 게 참 어렵다.”


이미 몇 해 전 결혼을 한 호쾌한은 슬하의 자식까지 있는 친구였는데 “야 다 그런 거야 하면 다 돼 참아”만을 읇는 로봇이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그 문장을 말하는 호쾌한의 생활 배경에는 부모님이 장만해주신 7억짜리 집이 포함된 관점에서 출발한 일화였다.



식의 작은 월세방에서 진행된 이 두 가지의 일화는 지금을 겨우 살고나 있는 우리에게 묵직하게 날아와 꽂힌다. 분명히 오늘 하루가 매우 고됐기에 달달해야 할 차디찬 맥주가 씁쓸하다 못해 비리다. 



돈이 없는 나는 이제 인간미를 가진 매력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나이기 시작됐음을 실감했다. 재력. 사랑의 시작 연애라는 관계. 사랑의 결실이 되는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 재력이라는 단어가 나타나 매력이란 건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야 루저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공격에서 높은 확률의 크리티컬이 터진다.

졸라 아프다.


내 앞을 막아선 벽을 오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오를 수는 있는가.  올라서야만 그 벽 뒤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걸까? 기꺼이 벽을 같이 올라줄 사람을 찾아 설득해야 하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주변의 모습에서 두 다리와 두 팔로 기어올라가야 하는 나의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잠시 침묵 아닌 침묵 속에서 “ 같네라고 말한다. 여과기가 필요 없는 상황 누가 먼저랄것 도 없었다.


며칠 뒤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친구인 “재”에게 했다.


재 또한 엿같은 이야기구나..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꽤 뒤에 지금 자신이 가진 국산차에 웃돈을 주고 외제차를 살 걸 그랬다 라는 대화로 주제가 바뀌었다. 그 이유는 대우와 대접 희생과 배려 같은 기브엔 테이크의 관점 때문에 불편하다는 견해였다. 하지만 내겐 그 조차도 없었다. 또다시 격차가 벌어지는 듯했다. 벽이 또 나타난 것이다.


이번엔 외제차를 타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얼마 전부터 소개팅을 여러 개 잡아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친구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반대로 외제차를 타는 친구와 헤어진 또 다른 친구는 일주일에 몇 개의 소개팅을 잡아 부지런히 소개팅을 나간다는 말을 한다. 외로움이 가중된다.


심지어 그럼에도 그들의 표현에  불행이 드리워져있는 듯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것을 그저 바라볼 뿐인 내겐 기회라는 게 오기는 하는 것일까. 크게 갖고 싶지는 않지만 갖지 못하면 시작할 수 없는 것처럼 들려오는 것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아닌 척, 쿨병 걸린 척 해도 쿨해질 수가 없는 격차. 인간적 성숙 혹은 사람의 됨됨이 건강한 가치관과 같은 이상적인 견해들을 키우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던 내 삶이 너무나 부질없어 보인다.


결국 물질 앞에 무릎이 반쯤 아니 꿇린다. (일어나)


그럼에도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금을 살아간다. 외로이 도를 닦으며 산에 들어가 살고 싶지도 않다. 고독한 시간의 연속, 외로움을 버티는 하루를 끝내고 싶지만 연애도 결혼도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짝을 지어 나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그 벽은 높다. 겨우 몇 달 전 내게 찰나의 관계가 생겼던 순간이 떠오른다. 호감 있던 여성과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썸. 잠시나마 두근거리던 만남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 관계에도 앞선 것들이 작용했을까? 아니면 내 모습에서 드러났을까.


외로움이 또다시 가속한다.


그렇게 내 주변 내가 관계하던 이들과의 대화가 나를 더 고립시킨다. 그러다 아직은 앞자리가 2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뜻밖의 전환점을 갖는다.


그들은 나보다는 나은 처지의 친구들이었다. 해외 유학생활을 하며 세상의 문화와 정서를 더 다채롭게 담아온 그들의 삶. 겉으로는 반짝반짝 빛나 보였지만 저마다의 사정과 아픔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의외였다. 담담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알코올 중독에 걸렸었던 어머니, 이혼 사실을 10년간 비밀로 한 부모님, 타향살이의 핍박 등 꽤 힘들었을 고충들을 어린 나이부터 짊어진채 그들은 지금에 와있었다. 그럼에도 누구보다도 밝게 말한다. 그렇치만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것들에 감사한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하다라고


그 순간이 너무나 고마웠다. 모두가 불행하진 않다고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스스로 깨닫도록 관점을 슬쩍 열어준다. 인생의 시작 그것은 부자로 태어날거야 라고 정할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지금 갖고 있는 것에 집중한다면 길이 있음을 말이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단어가 주는 위로를 받아들일 뿐이다.


소유한 집은 없지만 소유하지 않아도 관점을 바꾸어 살아낼 방법들 계속해서 연구하자. 자동차는 없지만 하루의 정리와 사색을 도와주는 따릉이가 있지 않은가. 두 다리 두 팔이 제기능을 하고  1.5 / 1.5의 시력 삼시 세 끼를 먹으며 살아왔다는 것. 등등



(그래 정신승리뿐이다.)



그대 나와 같다면 외쳐라 ”시발”


불행을 찾아 불행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했지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던 나날들. 여전히 나는 모순투성이인 인간이다. 다만 주변의 수많은 견해들을 통해 배운다. 곧이곧대로 타인의 방식에 매달리고 맹신하지 않으며 나만의 방향을 설정해가려 한다. 여전히 가난하고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있으며 꿈은 있지만 그 꿈을 위해 죽을힘을 다하지도 않으며 사는 내가 찡찡이와 다를게 무엇이란 말인가.


연애도 결혼도 가진 게 없어서 할 수 없다는 것은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하다. 딱 떨어트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부익부 빈익빈, 부정부패, 내로남불, 투기로 뒤덮인 부동산 시장, 불투명한 미래. 수많은 사회, 환경문제들이 우리를 안전 더 안전한 사람을 만나게 끔, 만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는 여전히 우리를 그렇게 교육 중이고 그것을 본 부모가 아이를 그렇게 키워 똑같은 루틴을 반복 중일 뿐이다.


이제 나를 포함한 우리는 연애도 결혼도 못해서 안 하고, 안 해서 못하는 쳇바퀴에 갇혀있다. 더 빨리 쳇바퀴를 돌려도 쳇바퀴에서 탈출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한 세상에서 짝을 만나 알콩달콩 소소한 모습으로 길을 거니는 사람들에게 그저 존중을 표한다. 부러우면 진 거지만 부럽다기보단 보기 좋다. 그렇기에 응원한다. (나자신도 응원한다.)


지금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된다. 재력은 매력이 맞고 매력의 지수를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것은 관계에 강요, 너그러움, 참을성도 만들어낸다. 그저 그것을 인정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뿐이다. 변하는 건 여전히 없다. 우리 사회의 1등 신랑감에는 가히 접근할 수도 없으리라. 그렇다고 나의 짝은 있겠지 운명을 믿어라고 말하며 방관하고 싶지도 않다.



자가발전뿐 뾰족한 대안은 없는 듯 싶다. 그래 그거 뿐이다. 그저 나의 길을 간다. 사랑은 기브 엔 테이크가 아니라는 말처럼 내가 가는 길에 소비가 아닌 생산을 더해줄 사람과 만나기를 그저 한 번은 빌어본다. 영영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막연한 희망 한줄기라도 붙잡고 최소한의 노력을 최대한 기울여 나아가다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진 않아도 땅에서 솟아날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