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가버린 사람들
최근 2~3년 사이, 내 주변에는 스스로 목숨을 놓으려 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 단 한 명만이 실패했다.
첫 번째는 아는 동생이었다. 어느 날부터 프로필 사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문신, 흉터를 드러낸 사진들. 변화는 놀라울 만큼 급격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피했다. 마음속으로는 원래의 그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만남을 거절할까 두려웠다. 휴대폰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공백이 그를 영원히 잠들게 만들었다.
그의 집 근처에 살던 언니가 가끔 그를 마주쳤다고 했다. 예전에 알던 친구와 다시 만나도록 약속도 잡아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약속을 펑크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
나는 쉽게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의 형 또한 이미 같은 선택을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형 대신 부모님을 위해 더 잘 살겠다고 말하던 동생이었다.
두 번째는 ‘시도’로 끝난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2년이 넘도록 빌렸다 갚았다를 반복했지만, 처음 빌린 돈만큼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195만 원. 인테리어 일을 하다 비싼 욕실 자재를 깨뜨렸다며 급하다고 했다. 부모님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화를 돌려 돈을 빌렸다고 했다. 걱정 말라며, 자신은 절대 돈을 떼먹는 사람이 아니라고 호언장담했다.
우습게도, 나는 그 녀석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돈을 빌려주었다. 다시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그때는 흔쾌했다. 아마 조울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기복 속에서 평소의 논리적 판단은 멈춰 있었다.
2025년 12월 28일, 그의 휴대폰으로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 좋은 선택을 했고, 뇌에 3분 이상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예전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정신을 차리고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분노가 더 크다. 마지막 대화에서 나는 말했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인데, 이러다 네 주변 사람들과의 사이는 어떡할 거냐고.”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죄책감으로 죽게 만들 생각이었나. 아무튼, 나는 호구였던 것 같다.
20대 초반, IQ 관련 책을 접했다. 그 책을 쓴 사람이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에 홀린 듯 가입했고, 그곳에서 사귄 친구의 권유로 멘사 테스트도 보았다. IQ 144, 1%가 모자라 불합격이었다.
그 책의 저자는 유난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늘 응원과 힘을 건네주었다. 좌절할 때도 이상하게 힘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운영하던 여러 공간 중 하나인 카페에 딱 한 번 찾아가, 그가 준 커피 쿠폰을 사용한 적도 있다. 그날 직접 그를 만났다.
장녀로 자라 위에 형제가 없는 나는, 그를 친오빠처럼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20대 내내 카페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그는 내게 ‘멋진 사람’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30대가 되며 카페 활동이 뜸해졌다.
2026년 1월 2일, 그의 부고를 들었다. 믿기지 않아 함께 일했다던 친한 동생분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침에 먼저 나가 작업을 시작했고, 혼자 술을 마신 채 취해 스스로 마감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웠다가 폭탄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침입하지 않을 깊은 밤,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 문득, 그분이 내가 카페에 올린 시를 좋아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댓글로 그 시를 바탕으로 그림을 하나 그려 보내달라고 했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결국 보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림이 부족해도 그냥 하나 보낼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 시는 내 브런치 시집 「나무 같은 이유가 있었다」에 실린 ‘바다 하루’였다. 글자 수를 맞추느라 그저 아름답게만 쓴 시.
봉안당에 계신다면, 작은 나무 조각에 그렸던 바다 그림이라도 넣어드릴 수 있을까 싶어 여쭈었다. 답 대신 사진들이 도착했다. 장례식장, 영정사진, 봉안당.
일하다 말고 울음이 터졌다. 왜 하필 영정사진을 보내주셔서. 왜 또 웃는 사진이어서. 생전 그가 짓던 그 미소가 떠올라서.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다.
함께 일하던 아이가 “아예 펑펑 울어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바다 하루
고운 천은 바다를 머금고 하늘이 되어라
하얀 솜은 바다에 떨어져 거품이 되어라
우는 새는 바다에 눈물을 숨기고 떠나라
가는 배는 바다에 그림을 그리고 떠나라
지친 해는 바다를 쪽빛의 꿈으로 채워라
은빛 달은 바다에 별들의 가루를 쏟아라
하루 끝에 바다는 고요를 나직이 품어라
(마지막 한 줄은 나중에 덧붙인 것이지만, 그분은 몰랐다)
이상하게도, 떠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나를 남겨두고 갔다. 말하지 못한 것, 보내지 못한 것, 걸지 못한 전화 한 통을 유품처럼 남겼다. 나는 그 조각들을 주워 들고 혼자서 오래 서 있었다.
자살은 늘 개인의 선택처럼 말해지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는 단체 이동에 가깝다. 한 사람이 빠져나가면, 주변의 마음들도 함께 끌려간다. 죄책감, 분노, 미안함, 이해하려는 노력까지. 그 모든 감정이 한 줄로 묶여 행군처럼 이어진다. 나는 그 행렬에서 낙오하지 않으려 애썼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던 이유는 강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 무너지면,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버텼다. 애도 대신 일상을 택했고, 슬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고독은 그렇게 쌓인다. 말하지 않은 마음들이 안쪽에서 발효된다. 누군가는 술로, 누군가는 잠으로, 누군가는 작업으로 그것을 눌러 담는다. 나는 글로 버텼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 역시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아서였다.
이 행군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아직 이쪽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떠난 사람들을 대신해 잘 살아야 한다는 사명 같은 건 없다. 다만, 오늘도 이쪽에 서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일이다.
고독의 행군은 영웅담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기록도 아니다. 그저, 아직 발을 떼지 못한 사람이 남겨두는 중간 보고서에 가깝다. 나는 오늘도 한 걸음만 걷는다. 멈추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여기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