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나 이루지 못한 꿈
*
“시아 엄마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어. 모든 것이 정해진 삶이었지. 명문대, 의대, 안정된 결혼. 하지만 그녀는 그런 틀 안에 갇히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어.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 색으로 말하고 싶어 했고, 선으로 숨 쉬고 싶어 했대. 하지만 장인, 장모님은 그런 걸 허락할 분들이 아니었어. 그녀가 공부 머리가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지.
결국 그녀는 가출했어. 그리고 음악 하는 남자를 만났지. 그 남자가 가진 자유, 열정, 이상, 그리고 그 세계에 푹 빠져들었어. 마치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낀 것처럼.
하지만 그 남자의 집안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엔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곳이었지. 결국 두 분은 그녀 몰래 그 남자에게 돈을 쥐여 주고, 먼 나라로 유학을 보내 버렸어.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그녀를 위한 길이었다고 믿었겠지.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소식을 알아보려 했고, 1년 만에 겨우 편지 한 장을 받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렸어.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결혼했을 거야.’라는 그 한 줄 때문에. 그녀는 그 밤, 끝없이 울었어. 그리고 아침이 왔을 때, 가족이 원하던 결혼에 순응했지. 더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은 채로.
그렇게 나와 결혼했어. 그 짧은 편지 한 장에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어.
시아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괜찮았어.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어느 날, 그 남자의 여동생이 찾아왔어. 울면서. 나는 불길한 예감에 그녀를 돌려보냈지만, 결국 어떻게든 시아 엄마를 찾아냈고… 그녀와 마주하고 말았지.
그 남자는 결혼하지 않았대. 편지를 쓴 건 분명 그였지만. 유학하러 가서 받은 돈으로 성공한 뒤, 당당하게 그녀 앞에 서고 싶어 했던 그는, 사기와 투자 실패로 모든 걸 잃었고, 암 진단까지 받았지. 그리고 마지막 편지를 보냈어. 자신은 이미 결혼했노라고, 그건 당신의 길을 찾아 이제 행복해지라는 뜻이었지. 자기 존재가 그녀를 가로막지 않게 하려던 마지막 배려였지. 그는 그렇게, 유학 간 나라에서 고독사했어.
이 사실을 안 시아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 기분을 추측하려는 것조차 무례하게 느껴질 만큼.
그날 이후 그녀는 조금씩 무너졌어. 정확히 말하면, 조울증이 점점 심해졌지. 어떤 날은 지나치게 들떠 있었고, 어떤 날은 깊은 구렁텅이 빠져 있었어.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 나도, 시아도. 지나가 버린 과거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녀를 위로할 방법도, 도울 길도 찾을 수 없었어.”
*
나는 남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다. 말없이, 숨소리 하나 새지 않게. 마치 그가 꺼내는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내 안에 묻듯이. 그의 말 한마디 하나하나에서 나는 시아 엄마의 삶이 조금씩,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음을 느꼈다.
나는 그가 말을 멈추고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가게 안은 고요했고, 우리 사이의 공기에는 아직도 그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렸다. 그저 시아 엄마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자꾸만 ‘시아’의 얼굴로 겹쳤다.
“그 애가 말을 안 하는 건, 게임만 하는 건, 시아 엄마와 관련이 있다고 했었지.”
남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낡은 폰에서 훔쳐봤던 영상. 거기에서 봤던 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아가 방 한구석에서 게임 속에 몰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단지 현실에서 도피하는 걸로만 보였다. 하지만 시아는 도망친 게 아니라, 거기에서만 자신이 숨 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엄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 조용한 무표정 속엔,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원한대로, 시아는 내보내도록 알아볼게. 외가로 보낸다던가, 병원을 알아본다던가, 집을 알아본다거나 할게. 하지만 그 애를 조금만 이해해 줄 수는 없을까? 매우 힘들었으니까, 이제 자기 엄마 대신 자유 속에서 살 수 있도록, 기다려주면 안 될까? 집으로 돌아와, 주호 엄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테이블 위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고, 조금은 슬퍼 보였다. 시아 엄마 대신 자유 속에서 살게 해 달라는 말, 그건 단순한 용서나 이해의 부탁이 아니었다. 그 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더 이상 짐으로 여기지 말아 달라는, 그런 부탁이었다.
시아가 방 안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화면 속 세상에서 웃고 있던 그 표정이, 어쩌면 이 집 어디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유일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던 곳.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 살아 있던 세계.
“시아, 지금 집에 있지?”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시아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기에 그렇겠거니 했지만 말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한 걸음, 나 자신에게 말하듯 움직였다.
‘지금 당장 무슨 대단한 걸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다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나는 친정집에 들어가 인사하고 주호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현관은 조용했다. 주호가 깨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도 가방을 내려놓고는, 물끄러미 시아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문틈 사이로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닫힌 방, 나는 잠시 그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열 수는 없었다. 아니,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문고리를 살짝 잡아본다. 그 안에 있는 세계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 아니면 또다시 그 애의 고요를 깨버리는 건 아닐까.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래도 그 애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걸.
거실 바닥에 주호의 작은 양말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에게서 벗겨진 것인지, 시아가 주워둔 건지 모를 그것을 줍다가, 시아의 문틈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게임 속 배경음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아직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난 여기 있어. 적어도, 이제는 너를 무서워하지 않겠다.
그날 밤, 나는 식탁에 시아 몫까지 밥을 차렸다. 언제 방에서 나올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자리를 만들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것이 어색한 다정함이든, 억지스러운 환대든, 적어도 나는 시도했다.
“시아야, 나와서 밥 먹어.”
반응 없는 방에서 돌아서 식탁으로 향했다. 시아는 끝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빈 그릇이 싱크대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나는 웃음인지, 눈물인지 모를 감정을 삼키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이 손끝을 적셨고, 나는 그 따뜻함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끼니마다 시아의 그릇을 하나 더 꺼내 두었다. 때로는 음식이 식어갈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지만, 그 빈자리마저도 이제는 내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시아가 꼭 말하지 않아도, 마주 앉지 않아도, 어쩌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는 건 아닐까. 문틈 너머, 아주 작은 바람 같은 변화가 느껴졌다. 나는 그 조용한 변화를 믿어보기로 했다. 주호를 키우듯이, 시아와의 시간도 키우기로 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는 몰랐다. 시아가 몽유병도 아닌 맨 정신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