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기로
*
하늘이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세상은 그냥 흘러가지. 내 세상은 흑백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계절은 무심하기도 하지. 그날 이후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속상한 거 알아. 하지만 널 잃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래서 지금이라도 용기 내서, 글자로 말해주려고.
그날,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를 먼저 찾았어. 거실에 갔을 때, 무언가가 내 목을 졸랐어. 어떤 단단한 끈이 내 목을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어.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눈물이 흘러넘치는 얼굴로 내 목을 조르는 엄마를 봤어. 정신이 아득해졌어. 아무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어. 세상이 희미해졌을 때, 어떤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 근데 다시 떠올려 봐도, 모르겠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어.
눈을 떴을 때, 매달려있는 엄마를 봤어. 이미 식어 있었어. 나를 두고 떠나 버렸어.
네게 이 이야기를 하면, 네가 어떤 반응을 하든 싫을 것 같았어. 그래서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던 거야.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종종 연락해도 괜찮은 거지? 네가 말했잖아. ‘졸업해도 꼭 연락해’라고.
그렇게 할게. 그럴 수 있게 해 줄래?
너의 친구, 이시아가.
*
시아 친구는 그 편지를 보여준 뒤, 다시 노란 봉투에 조심스레 넣어 품에 안고 떠났다. 나와 남편은 나란히 앉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마, 시아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시아 엄마가 시아와 함께 세상을 떠나려 했다는 것. 그리고 시아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시아는 어쩌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평생 짊어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마 엄마의 손에서 죽을 뻔했다는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았을 것이다. 목을 조르던 사람이 엄마였으니까.
문득, 그날 밤 내 목을 조르던 시아의 손길이 떠올랐다. 현실과 악몽의 경계에서 헤매던 그 아이에게, 나는 무심코 말했다. ‘같이 방에 가자.’ 그 말이, 혹시 ‘함께 떠나자’라는 신호로 들렸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지마는, 서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시아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밤이 깊도록 골목마다 발길을 옮겼지만, 시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어딘가에 쓰러져 잠든 걸까? 아니면 이미 먼 곳으로 가버린 걸까? 텅 빈 길거리의 냄새만이 묵직한 절망처럼 따라붙었다.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짧은 잠에 몸을 던졌다.
아침, 주호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남편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주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뭐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주호 목에는 작은 하트 모양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거 당신이 걸어준 거 아니었어?”
남편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어루만지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이건… 시아 엄마가 시아한테 사준 거야. 아주 어렸을 때.”
말끝에 걸린 침묵은, 누군가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듯 무거웠다. 이 목걸이를 주호에게 걸어준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시아.
그럼, 언제? 그 답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시아가 주호의 목에 손을 댔던 순간. 나는 그 손짓을 오해했다. 주호의 가냘픈 목을 조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는 어쩌면 선물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건네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져갔다. 나는 대체 무엇을 본 것이며, 무엇을 믿었으며, 시아에게 무엇을, 저질렀던 걸까. 시아의 손끝이, 그 하트 펜던트를 걸어주던 다정한 손으로 떠올랐다. 내가 본 건 폭력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인사였고, 사랑이었다.
시아가 사라졌음을 알고 친정에서 엄마가 찾아왔다.
“주호는 내가 돌보고 있을 테니, 둘이서 나가 경찰에 신고하든 돌아다니면서 찾아보든 해라. 내가 집을 알아봐 주든, 병원을 알아보든 하라고 했지, 누가 쫓아내라고 했냐. 어서 둘 다 나가 봐.”
나는 엄마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주호를 안은 엄마는 우리를 힐끔 바라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애는 엄마 없는 세상에서도 버티고 살아왔는데,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한대니.”
엄마의 목소리에서는 작은 분노와 슬픔이 엉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남편 역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을 나섰다. 현관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우리는 다시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지는 기분 나쁜 아침이었다. 우산을 펼쳐 들었다. 골목마다 희미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간간이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무심했다.
시아가 갈 만한 곳을 떠올려봤다. 학교 앞 분식점, 도서관, PC방. 그러나 어디를 가도 시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졌다.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어쩌다 그날 그 아이의 마지막 신호를 놓쳐버린 걸까. 내 한 마디, 내 한 행동이, 시아를 어디로 밀어버린 걸까.
남편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때론 절뚝이며 걷고 또 걸었다. 길가 전봇대마다, 건물 담벼락마다 시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언제나 무표정,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 가슴이 조여들었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가도, 금세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이 덮쳐왔다.
“주혜야.”
남편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 경찰에 가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깊이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에는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파출소를 향하는 길, 나는 문득 하천 근처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긴 아직 가보지 않았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다,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먼저 파출소로 가. 나는 하천 쪽을 가볼게.”
남편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나는 허겁지겁 하천 쪽으로 달렸다. 비 오는 날의 공기는 서늘하고 축축했다. 하천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풀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만이 귀에 스쳤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다리를 건너고, 둑길을 따라서 걷고 또 걸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천은 왜 이렇게 긴지. 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하천 둑 아래에서 무언가 익숙한 색깔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낡은 슬리퍼 한 짝이었다. 시아가 늘 신던, 민트색 슬리퍼. 진흙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무릎이 풀렸다.
손이 떨리는 것도 잊고 슬리퍼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슬리퍼를 품에 끌어안았다. 우산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시아의 체온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가운 바람만이 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신발 한 짝만 두고 어디로 간 거니. 가슴이 뭔가를 삼킨 듯 묵직하고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