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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샤Asha Dec 20. 2016

네팔은 여전히 아름답다

자연 앞에 겸손한 이들에게 배우는 삶의 이야기

신들의 나라 네팔, 히말라야의 아름다움 아래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013년, 2014년 2년간 머물렀던 시간들을 순서대로 기억하며 네팔의 여행지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과 365일이 축제인 그들의 삶을 나눕니다. 2015년, 4월 대지진 이후 관광객이 줄었습니다. 다시 희망을 일구어 가는 네팔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억하며, 애도하고, 희망하는 여정을 2017년 1월 다시 떠납니다


지금은 2069년 10월 3일, 겨울에 착륙하다. 


서양력으로는 2013년 1월 16일었다. 그림 그리는 동호회 분들과 출장으로 한번 왔던 네팔의 겨울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히말라야 산자락의 바람인가.. 손끝이 오들오들 쪼그라드는 바람과 함께 붉은 벽돌의 복도, 바람에 실려오는 향냄새, 아수라장의 컨테이너 벨트 위 만신창이가 된 박스들을 겨우 지나 밖으로 나오니 더 가관이다. 그때 ‘나마스떼’ 라며 말라(금잔화 꽃을 엮어 만든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마중 나온 아저씨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고 네팔로 돌아온 벅터씨와 부펜드라 씨였다. 자기 택시에 태우려는 네팔 다이(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오빠, 아저씨 같은 느낌의 단어) 들에게 정신줄 놓고 끌려 타 기직 전에 만난 구세주 같은 아저씨들은 짐을 옮겨주셨고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했다. 이민가방을 내린 곳은 방콕의 카오산로드 같은 배낭여행자들의 거리인 ‘타멜(Tamel)’ 내 게스트하우스였다.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를 네 팔살 이를 위해 압축적으로 싸온 이민가방을 얼마 나있을지 모를 게스트하우스에 풀고 아저씨들을 따라 네팔의 주식인 달밧(달은 다양한 콩으로 만든 국 같은 것이며, 밧은 쌀밥을 뜻한다. 콩국과 쌀밥 주위로는 카레와 향신료에 볶은 다양한 야채와 감자들이 반찬으로 있다.)을 먹고 에베레스트 맥주 한잔을 하니 정말 네팔에 온 듯했다. 아니, 숙소로 돌아오니 뼈저리게 느껴지는 네팔이었다. 지금은 건기인 겨울이고 전기는 하루 12~14시간씩도 안 나온다고 했다. 내가 묵는 하루 5-6천 원짜리 게스트하우스는 태양열로 물을 뎊히고 있었고 그마저도 누군가 다른 방 손님이 먼저 쓰면 영락없이 찬물로 몸 언저리만 축여야 했다.

그때 들리는 비명소리! 두려움에 떨며 씻고 있는데 옆 방 서양 여자의 찬물 샤워 비명소리는 마치 한방에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대충 씻고 나와 어두컴컴한 침대에 누웠다. 전기가 들어올 때 인버터로 전기를 충전해두었다가 전기가 나간 시간에 약한 불 하나만 겨우 켤 수 있었다. 순간 과거로 온 기분이었지만 네팔은 지금 2069년이란다. 길거리엔 최신 전자기기와 패션을 겸비한 동서양의 여행객들로 붐비고 근처 라이브 클럽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1980년대의 레드 핫 칠리 페퍼스와 현재의 아델을 오간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시골스러우면서도 국제적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간다.


여행자거리 타멜(Tamel) 입구


아샤(ASHA), 다시 희망


뻐근한 몸을 일으켜 어제 뵈었던 아저씨들 중 벅터씨와 역시 귀환 이주노동자로 다양한 비영리기관 활동을 하고 계시는 쉬디 씨를 뵙고 인사한 후 여행자 거리 타멜에서 이어지는 현지인들의 큰 시장인 어선 시장을 걸었다. 거리 곳곳에 있는 힌두교의 다양한 크고 작은 사원 주변으로 네팔 사람들이 꽃을 놓고, 쌀을 뿌리고, 티카라고 빨간 염료를 찍는 종교적 표식을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침 식사 전에 신께 인사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기 위해 뿌자(Puja)를 하는 거라 했다. 네팔 사람들이 물 마시듯 마신다는 찌아(인도에서는 짜이, 미얀마에서는 럿페예라고 부르는 밀크티이다. 정확인 ‘두 찌아’라고 해야 네팔에서는 밀크티이며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홍차에 설탕 타서 마시는 찌아는 ‘깔루 찌아’라고 부른다) 한잔이면 얼었던 몸을 녹여주며 달콤한 휴식을 선사해주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회의에는 찌아가 빠질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네팔에 여행 온 게 아니었다.


네팔에 오기 전 4년 정도는 공정여행(여행자들이 소비하는 돈이 여행지의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며, 좀 더 친환경적으로, 여행지의 사회와 문화를 존중하며 관계 맺는 여행을 지향하는 대안적 여행을 일컫는 용어로 해외에서는 Responsible tourims 또는 Sustainable tourism이라 부른다.) 관련 회사인 ‘착한 여행’에서 일하면서 여행이라는 매개로 아시아지역을 만나는 일을 했었다. 출장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만났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한 나라에서 살면서 그 나라를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참에 좋은 기회로 네팔에 ‘일하러’ 오게 된 것이다. 아저씨들이 회의하다가 네팔 이름을 지어주신다고 했다.


“저 방글라데시 친구가 지어준 이름 있는데. 아샤(ASHA)라는 이름이에요.”

“아샤는 네팔에도 있어요~ ”

“그래요? 아샤는 ‘희망’이라는 뜻이랬어요”

“네팔도 똑같은 뜻이에요. 희망!”

그렇게 내 이름은 다시 아샤가 되었다. 나랑 같이 네팔에 일하러 온 언니는 ‘마야’(Maya)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야는 사랑이라는 뜻이랬다. 아샤와 마야. 그날부터 언니와 나는 아저씨 둘과 두 달간 추운 게스트하우스에서 짐도 못 풀고 버티며 카페 및 사무실로 사용할 건물을 구하러 다녔다. 여행자인 듯 여행자가 아닌 채로 여행자들이 득실거리는 타멜에서.. 그날 밤도 근처 라이브클럽에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다.


‘어이, 청년-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엄청 좋아하네. 언제까지 똑같은 것만 할 거요?’라는 생각을 하며 이불 끝을 코밑까지 끌어올렸다. 그땐 몰랐다, 똑같은 노래를 두 달 아니 내가 네팔에서 머물렀던 2년 동안 들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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