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언어 공부의 대장정으로
초등학교 시절 처음 컴퓨터라는 신 문물(당시에는 86, 286이었다)을 접한 뒤, 도구로서의 영어에 호기심을 느껴 영어 교사의 꿈을 키우며 대학교에서는 영어를 전공하고, 이후 약 10년 뒤에는 미국에서 변호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잠시 일본어에 흥미를 느껴 독학으로 JLPT N3를 취득하기도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 인생에서의 주요 과제는 영어를 공부하고 다듬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형사법 실무를 하거나 무료 법률활동(pro bono)을 하다 보면, 라틴계 이민자 출신 의뢰인을 도와줄 일이 참 많다 보니 스페인어를 할 줄 알면 참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단순히 편의상의 목적보다는 조금 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감상적(?)인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건물 청소부, 공사장 인부, 배달부, 수리 기술자, 보모, 식료품점 직원 등의 상당수가 라틴계 이민자들이다. 대부분 멕시코, 엘 살바도르,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등 남미에서 이민 온 이민자들이 많은데, 대부분 본국의 혼란스러운 치안과 정국을 피해 목숨 걸고 미국 국경을 넘거나 혹은 가족을 남겨둔 채 열심히 돈을 벌어서 집으로 송금하는 역(?) 기러기 아빠들이 많다.
예전에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이 해외로 파견되어 외화를 벌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의 친척 중에서도 예전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파견 간호사로 일했던 분이 계신데, 어려서부터 나는 그분을 "사우디 이모"라고 불렀으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마 현재의 남미의 아이들에게는 수많은 "미국 삼촌" 혹은 "미국 이모"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내가 대리하게 되는 이러한 미국 삼촌이나 미국 이모들은 형사 사건에 연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서류 미비(불법 체류) -> 합법 신분증명 불가 -> 운전면허 취득 불가 -> 무면허 운전 -> 면허 정지 -> 면허정지 위반 -> 추가 정지 -> 면허정지 재위반의 수순을 밟게 된다. 미국에서는 운전을 못하면 일상생활은 물론 직업을 구하기조차 매우 힘들기 때문에,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생계를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경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추방을 당하든지, 노숙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예전에 국선 사건으로 빈집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기소된 나이 지긋한 라틴계 노숙자를 대리한 적이 있었다. 한 겨울 추위를 잠시 피해서 폐가에 들어가 장작으로 불을 때고 거기에서 며칠 숙식한 혐의였다. 내가 보석신청 여부를 묻자, 그는 밖에서 추위에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노숙자 겨울 쉼터가 열릴 때까지 구치소에 머무르는게 나을 것 같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내가 알았다고 한 뒤, 최선을 다해서 변호해 주겠다고 하니 내 손을 꼭 잡고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더 건네주고 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잠시 듣고 싶었지만, 통역관의 사무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봤을 때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아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보통 국선이나 무료 법률 사건의 경우에는 국가나 단체에서 통역을 지원해준다. 그런데 통역이 중간에 껴 있으면 나와 의뢰인 사이에 커다란 벽이 하나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한테 문자나 이메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통역을 통해서 내가 뭔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도, 의뢰인 입장에서는 내가 아닌 통역이 의뢰인에게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주저하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 새해가 다가왔고 올해에는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의뢰인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매일 아침 1시간 더 일찍 일어나서 매일 1시간이라도 꾸준하게 스페인어를 공부할 예정이다. 영어와 일본어에 이에서 세 번째 언어 공부이기 때문에 자신도 있다. 연말쯤에는 더듬거리면서라도 의뢰인과 대화를 하고, 더 나아가 기회가 되면 DELE A2나 B1을 취득하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