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재미, 문화 체험 세 가지를 얻다
내가 20대에는 참 이런저런 다양한 알바를 많이 했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기억이 나고 지금까지도 내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험이 있다. 바로 미국 여름캠프에서 캠프 카운슬러(Camp Counselor)로 일한 경험이다. 카운슬러라고 하면 뭔가 "상담사"같은 느낌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수련회 교관"정도의 느낌이 더 강하다. 물론 미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수련회 교관 같은 위엄과 권위가 있는 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레크리에이션 강사"쪽에 더 가깝다.
때는 2007년 4월 막 전역했을 무렵이다. 이미 3월 봄 학기에 복학은 무리고, 가을부터 역학기 복학을 하기는 싫어서 차라리 약 11개월을 휴학하며 자기 발전과 경험의 시간을 갖도록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에 띈 것이 미국 여름캠프에서 캠프 카운슬러를 구한다는 공지였다. 미국의 여름 캠프는 우리나라로 치면 수련회 + 야영 같은 것을 합친 개념이다. 물론 캠프마다 조금 다르긴 한데, 대부분 문명과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오두막에서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3주 정도 어린아이들이 숙식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즐기는 곳이다.
내가 배정받은 캠프는 위스콘신 주의 주도인 매디슨에서 약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Rhinelander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남자아이들 전용 여름 캠프였다. 커다란 호수를 접하고 있는 이곳 캠프의 이름은 Camp Deerhorn인데, 여기에는 아이들이 다양한 야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야구장, 테니스장, 농구장, 사격장, 요트장, 승마장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 군 복무 경험이 있었기에 "사격장 강사"(Riflery Instructor)으로 채용되어서 여름 동안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카투사로 전역을 했기 때문에, 그보다 적절한 역할은 없었을 것이다.
채용 조건도 꽤 괜찮은 편이다. 일단 편도 항공편 지원, 여름 내내(약 2개월) 해당 캠프에서 숙식 제공, 캠프 종료 시 시급 계산해서 임금 지급 등이 조건이었다. 그제야 알게 된 것인데, 미국 여름 캠프에서는 종종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종종 해외에서 캠프 카운슬러를 구하기도 한다. 내가 갔던 캠프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아시아계 외국인 카운슬러였고, 나 외에 영국에서 온 대학생 카운슬러가 있었다. 그 외에는 다 미국 현지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대학생들이 카운슬러로 일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캠프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자기가 올해 몇 년째 Camp Deerhorn에 온 것인지를 밝힌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카운슬러들은 이미 본인이 어렸을 때, 캠퍼(즉 참가자/고객)로 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캠퍼들의 연령대는 보통 8~14살인데, 8살부터 14살까지 매년 빠지지 않고 캠프에 참가했던 고정 멤버가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보조 카운슬러(assistant counselor, 줄여서 AC)로 활동하다가 대학생이 되면 정규 카운슬러가 되는 식이었다.
여름 캠프를 통해서 미국 아이들은 독립심, 자립심, 사회성, 모험심 등을 배운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생~중1, 2학년 아이들이 전기도 없는 산속 오두막에서 1주~3주간 부모와 떨어져 수련회를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보통 캠프에 처음 참가하는 아이들은 입소 첫날 홈식(homesick, 향수병)으로 집에 가고 싶다며 울지만, 2주가 지나서 집에 갈 때가 되면 그 사이에 사귄 친구들과 카운슬러들과 헤어지며 울며 아쉬워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 보통 캠프는 아이들이 집과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정이 촘촘하게 짜여 있다.
전체적인 캠프 프로그램의 구성은 학교와 비슷한데, 교실 수업 대신 각종 스포츠와 야외 활동이 주가 된다고 보면 된다. 아침 7시쯤에 모두 기상해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에서 오전·오후 각각 약 2~3개의 활동을 배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카운슬러들은 어렸을 때 본인이 수년간 캠퍼로서 해당 활동을 배운 적이 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해당 분야에 관심이 생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업의 질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카투사로 군 복무하며, 기본적인 병기 관리나 사격장 안전 통제, 사격술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사격장 관리 및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카운슬러가 되었다. 어린이 여름 캠프에서의 사격을 생각하면 장난감이나 BB탄 총을 사용할 것 같지만, 장약이 들어간 .22구경 실탄을 사용한다. 화력은 약하지만, 멧돼지 살상용으로도 쓰이는 실탄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명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8살짜리에게도 실총 사격을 시키는 미국 여름캠프의 위엄...) 게다가 그냥 아무 데나 막 쏘는 게 아니고, 약 25미터 거리에서 정식 표적지를 향해서 쏘는 것인 만큼 내가 군대에서 배웠던 M-16A2 소총 사격 지식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호흡법, 소총 파지법, 영점 조절 등등)
사내아이들 치고 총에 관심이 없는 이는 드물기 때문에, 사격 수업은 항상 인기가 많았고 덕분에 나도 덩달아 캠프에서도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은 카운슬러 중에 하나였다. 캠프 측에서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격장 유지에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구매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자율성을 주었고, 총기 소지나 안전 관리 등의 추가 근무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일부 업무를 면제시켜주기도 했었다.
이렇든 주로 사격장을 관리 감독하면서 지내다가 가끔 바로 옆에 위치한 테니스 장 카운슬러 자리가 공백이거나 하는 경우, 종종 테니스 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사실 레슨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다른 테니스 강사들을 보조하면서 다양한 테니스 놀이 방법에 대해서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현재 파트타임 테니스 코치로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경험이었다.
주말에는 캠프 활동의 꽃, 캠프 파이어가 있었다. 보통 일요일 저녁 큰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각자 장기를 뽐내는 시간이었다. 보통은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마시말로우를 구워 먹는 것이 일상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거의 매주 나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는데, 내가 가장 자주 불렀던 노래는 퀸의 We Will Rock You 였다. 아무래도 딱히 반주가 필요 없이 손뼉과 발구름으로만 박자를 맞출 수 있는 흥겨운 노래라서 다들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외에 가끔 무리수(?)를 두며 에미넴의 Lose Yourself 등을 시도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2008년 여름 약 두 달간을 캠프에서 보내고 귀국하기 전에 받은 주급을 정산해서 받아보니 약 3천 불 정도가 되었다. 편도 항공편을 지원받았으니, 본인 부담 항공료 약 천 불을 제외하곤 약 2달간 일하고 2천 불 정도를 받은 셈이다. (물론 숙식 제공을 받았으니 실질적으로는 조금 더 받은 셈) 더불어 캠프 활동이 종료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J-1 비자가 만료되기 전 Grace Period를 활용해서 미국 여행도 덤으로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시카고나 뉴욕 등 한국 직행이 있는 대도시 구경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맞들여서 대학교 재학+졸업 후 1년까지 같은 캠프에서 총 4번의 여름 시즌 동안 캠프 카운슬러 활동을 하게 되었다. 마침 대학교는 방학이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였기 때문에 기말 끝나자마자 한국을 떠나서 약 2달간의 외노자(!) 생활을 하다가 개학 직전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대학교 학기 중에는 과외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방학 동안에는 캠프 카운슬러로 번 돈으로 등록금을 해결하며 대학생 치고는 차도 굴리는 나름 여유 있는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물론 학기 중에는 집-> 학교-> 테니스장-> 과외-> 집 무한 반복하느라 차가 필수였고 딱히 그 외에 돈 쓸 일이 없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약 4 시즌의 캠프 카운슬러 활동은 나에게 어린이~청소년기 혹은 대학생들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미국인의 아웃도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한국에서만 자란 나는 미국의 아이들의 생활이나 관심사에 대해서 책이나 영화로만 보아왔었는데, 직접 아이들과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가끔은 미국 대학생인 동료 카운슬러들과 업무를 마치고 근처 바에서 맥주 한잔하며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문화에 젖어볼 기회가 있었다. 카투사로 2년을 복무하면서 나름 미국의 문화나 업무에 대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캠프에서의 활동은 또 다른 신선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 로스쿨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캠프 카운슬러 활동에 어느 정도 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로스쿨 1학년을 보냈던 미시건 주립대(MSU) 로스쿨에 갔던 이유 중에 하나도 내가 캠프에서 사귀었던 친한 친구 중에 한 명이 캠프 활동 당시 미시건 주립대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년이 넘게 지난 이 시점에서 그때 페이스북 친구 맺었던 많은 캠퍼들과 아직까지 종종 교류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볼에 금발의 솜털이 송송 나 있던 천사 같은 귀여운 아이들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벌써 장성하여 사내 냄새 풀풀 풍기는 어엿한 건장한 청년들이 되어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2008년에 디렉터한테 보냈던 이메일을 다시 찾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영어를 전공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이라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문장이나 단어가 초등학생 수준에 문장 구성도 참 유치했던 것 같다. 지금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정착하여 영어로 서면을 쓰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는 걸 보면 그동안 나도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언제 기회 되면 여름에 다시 한번 캠프에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