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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린 라이트는 항상 그린 라이트는 아니다

도로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

by 김정균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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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라이트?>


예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최근 미국에서 자차 운전을 자주 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보려고 한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거의 10년 동안 한국에서 운전을 했기 때문에 한국식 교통체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유학 초기에는 운전을 할 필요가 없어서 운전면허증을 만들지 않았는데, 갈수록 운전면허증은 단순히 운전 자격을 증명하는 것 외에도 신분증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학 2년 차부터는 현지에서 면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다행히 워싱턴 DC는 외국 면허증 소지자에게 실기 시험을 면제해주기 때문에 필기시험만 준비하면 되었다. (버지니아는 필기마저도 면제다. 즉, 한국 면허증이 있으면 기타 체류 증명만 되면 버지니아 주 면허증을 바로 받을 수 있다)


각설하고 미국의 교통체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liberal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느슨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말은 운전자가 조금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좌회전이다. 미국에서 운전을 하면 거의 80~90% 경우에 비보호 자회전을 하게 된다. 즉, 좌회전 신호를 받아서 좌회전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맞은편에서 오는 직진 차량이 없는 경우에 (혹은 멀리서 온다든지 아니면 천천히 온다든지 하는 경우에도) 눈치껏 좌회전을 하는 것이다. 물론 맞은편 차량이 브레이크를 밟게 할 정도로 무리하게 좌회전을 하면 Illegal Left Turn으로 딱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는 반대편 방향에서 운전하는 차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본인이 초록색 신호를 받고 교차로를 통과하더라도 항상 반대쪽 차선에서 좌회전하는 차량이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초록색 신호이기 때문에 우선권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좌회전하는 차가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린 라이트가 그린 라이트가 아닌 셈이 된다.


보행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좌회전 차량이 진입하는 도로에는 대부분 보행자 건널목 신호가 초록불이기 때문에 보행자가 좌회전하는 차량의 진로를 가로막게 된다. 물론 이 경우에는 당연히 보행자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그렇다고 좌우를 살피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자칫하면 좌회전하는 차량에게 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린 라이트라고 무조건 그린 라이트가 아닌 것이다.


미국에서 운전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바로 이 좌회전이 아닌가 싶다. 특히 번화가에서는 1차선이 좌회전 전용 차선이 아니고 직진 및 좌회전 겸용 차선인 경우가 많다. 이때 좌회전을 하려고 서 있으면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도 많고, 게다가 맞은편 차들이 계속 와서 기회를 엿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맞은편에 차가 없어서 좌회전을 하는데 마침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들어서서 양보하느라 맞은편 차선에 역주행 방향으로 한 동안(짧게 몇 초라도) 서 있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차들이 나에게 정면으로 달려오는 상황이 꽤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자유로운 미국의 교통 체계에서는 장점도 있다. 차량의 통행이 신호 때문에 막히는 경우가 적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좌회전 신호가 있는 교차로에서 이 신호에 혜택을 받는 차량이 없는 경우 이는 오히려 다른 방향 쪽 차량의 진행을 더디게 하고, 러시아워에는 정체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미국에는 러시아워 시간이라도 신호등 자체가 정체의 추가 요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어떤 교통체계가 더 안전한지는 잘 모른다. 갑자기 한국 교통체계가 미국식으로 하루아침에 바뀐다면 당연히 교통사고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미국식 교통체계에 익숙해지면 당연히 이런 부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람들도 조심하기 때문에 한국식과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의 현상을 법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나는, 미국 법의 사고방식이 교통체계에도 녹아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법적으로는 나에게 어느 정도 권리가 주어지지만 (교통 신호로 치면 그린 라이트), 그 권리가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그 권리가 언제든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내가 권리 행사를 함에 있어서 이러한 불법적인 권리침해자들을 대비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내가 우선권이 있더라도 상대방이 이를 무시하고 들어오다가 내게 더 큰 상해나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법적으로 가면 상대방의 과실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종종 그 어떤 보상도 신체·정신적 피해를 복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즉, 그린 라이트라고 항상 그린 라이트는 아니다. 조금 더 고상한 말로 하자면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Equity aids the vigilant and not those who slumber on their rights)"라고 할까?


글: 김정균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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