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나눔의 즐거움
얼마 전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VA)에 위치한 윌리엄 앤 매리 로스쿨(정확히는 The William & Mary Law School)의 아시아 학생회(APALSA, Asian-Pacific American Law Student Association)에 초청을 받아 커리어 패널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는 내 블로그 구독자였던 3L 한인 재학생이 제안을 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작년 초 정부로 이직한 뒤 로스쿨 컨설팅 업무를 그만 둔지 1년이 넘었고, 당시 내 삶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던 멘토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하던 참에 이런 제안이 와서 흔쾌히 수락을 했다. 행사는 목요일 늦은 오후라서 아예 목요일과 금요일 연차를 냈다. (아직 공무원 저년 차라 연차 적립률이 한 달에 하루(8시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연차 사용이 매우 조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전혀 아깝지 않았다)
작년 가을 한국 방문을 제외하곤 우리 부부가 여행을 간 적도 없어서, 마침 오랜만의 나들이라고 생각하고 둘 다 연차를 내고 목요일 아침에 윌리엄스버그로 출발했다. 비교적 이른 아침 8시쯤 출발을 했지만, 의외로 가는 길이 막혀서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어렵사리 도착을 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고 약 30분~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차라리 조금 일찍 로스쿨에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 싶어 실제 행사 시간이 5시보다 이른 4시 30분쯤 도착했다.
로비에서 어떤 얘기를 할까 고민하며 노트패드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학생 두 명이 다가와서 내 이름을 묻길래 대답했더니 자신들이 오늘 커리어 패널 행사 진행 요원이라고 하며, 강의실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시작 전에 오면 된다고 했다. 알았다고 한 뒤, 로비에 앉아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몇 가지 정리하다 보니 시간 되어 10분 전쯤에 실제 행사가 이뤄지는 강의실에 도착을 했다.
강의실에 도착을 하니, 나 외에 다른 패널리스트(대형 로펌 어쏘 1명, 개인 펌 대표, 로스쿨 교수 등)이 와 있었다. 각자 간단히 자기소개와 스몰톡을 하다 보니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전에 질문 내용을 미리 공지 받지 못해서, 과연 어떤 질문이 들어올지 몰라 약간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대부분 예상 가능한 것들이었고, 답변 순서는 패널리스트 중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이 먼저 답변하는 식이어서 큰 부담을 없었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그중에 기억나는 것들을 몇 개 나열하면,
-국선 변호인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1인 개업을 한 동기는?
-1인 개업 변호사로 활동할 때 어떤 식으로 영업을 했는지?
-개업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어떻게 법 분야를 바꿔서 정부에서 일하게 됐는지?
-소수 인종 변호사로 일하면서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어떻게 해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기는?
(아마 오랜 전부터 내 블로그를 구독해 온 독자라면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 것 같다)
등이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패널리스트들의 답변(질문 내용은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모두 있었다)을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들 각자 다른 법 분야, 다른 커리어를 거쳐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 정말 신기했다.
1시간으로 예정되었던 패널 디스커션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고, 이어서 리셉션이 진행되었다. 리셉션에서는 학생들과 좀 더 가까이에서, 비 격식적인 방법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나도 로스쿨 학생으로서, 선배 변호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언젠간 나도...'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걸 보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원래 나는 네트워킹 행사에 가면 리셉션에 거의 참여하지 않거나, 있어도 일찍 끝내고 오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초청 인사(?)로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을 넘겨 거의 한 시간 반 동안 리셉션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1년 동안 억눌러왔던 조언이라고 쓰고 꼰대 본능(?)이 충족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학생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우쭈쭈해주니 신나서 그런 것도 있었다)
코로나 이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학생들을 만나서 교류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것인지를 잊고 살았다. 아무리 재택근무가 편하다곤 하지만, 역시 인간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이렇게 실제로 만나서 교류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런 기회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워싱턴 디시에도 로스쿨들이 많이 있지만, 디시 지역에는 사실 나보다 훨씬 훌륭하신 변호사분들이 많아서 사실 나를 불러줄 만한 학교가 있을지 모르겠다 ㅋㅋ (이 글을 보시는 디시 로스쿨 재학생분들이 있으시면 연락 환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기회를 통해 언젠가 로스쿨 교수도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교수가 되기에는 학벌이나 경력이 한참 딸리지만, 뭐 지금부터 한 10년 정도 천천히 계획을 하면 어디 조그만 로스쿨 교실 구석에서라도 내 강의에 귀 기울여줄 만한 학생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