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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Mar 25. 2023

You are what you wear.

옷이 날개

재택근무가 1년이 넘다 보니 가끔은 코로나 이전 시절, 특히 개업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때는 거의 매일 같이 수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채 법원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 당시에는 재택근무라는 생각 자체가 낯선 개념이라 그냥 모든 것이 당연하기만 했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나는 법원(courthouse)을 좋아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외과의사가 병원에 들어서는 느낌 혹은 목회자가 교회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법원이 낯설고 무겁기만 한 곳이지만, 나에게 법원은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하지만 성스로운 곳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법원에 출석한 일반인들은 저마다 법적인 문제를 짐처럼 끌어안고 종착지 없는 기차를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내심 우월감 비슷한 것도 느끼곤 했다.


[얼굴이 합성 같다면 기분 탓이다...]

법원이 병원이나 교회라면, 법정(courtroom)은 수술실 혹은 예배당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은, 테니스 선수가 테니스 코트에 들어서는 기분과 마찬가지이다. (법정과 테니스코트 모두 영어로 court를 사용한다는 게 괜한 우연이 아니다) 아니, 검투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강철로 만든 빛나는 갑옷 대신 캐시미어 수트를 입었고, 예리한 칼 대신 더 작고 치명적인(!) 만년필을 품에 지녔을 뿐이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는 모든 것이 원격으로(심지어 재판도!) 바뀌면서 수트를 입을 일이 급격하게 줄었다. 그나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사무실로 출근을 할 때만 수트를 입다 보니, 왠지 이 모든 과정이 너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내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자각시켜주던 수트와 법원 출석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없어지다 보니, 시나브로 '나는 변호사다'라는 프라이드가 사라지고 그냥 왠지 "사무실 직원 A" 혹은 "공무원 B"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사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원격 회의를 하더라도 카메라를 켜는 것은 강제나 의무가 아니었기에, 옷은 가장 편한 잠옷(하도 입어서 목둘레가 늘어나 헐렁하고 습기가 차서 살짝 눅눅하지만 마치 제2의 피부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과 반바지를 입고 일할 때가 가장 많았다. 머리는 마치 아인슈타인 박사가 방금 막 레슬링을 하고 온 것처럼 엉망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회의 중 카메라를 켜는 일이 적었고, 왠지 남들이 나를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회의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곤 했다.


대략 이런 느낌(나는 아래의 MK처럼 사진도 없다...) <출처: Microsoft>


그러다가 어느 날 귀차니즘을 물리친 채 풀 수트를 입고 사무실에 출근한 날, 우연히 한 화상 회의에 오랜만에 카메라를 켜고 참여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내가 그동안 이메일 혹은 전화로만 연락하던 의뢰인이 내 얼굴을 처음 봤다고 너무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의뢰인은 종종 카메라를 켠 적이 있어서 나는 그 의뢰인의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켠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생각이 살짝 들었다. 한편 그렇게 나를 반겨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에는 멘토십 프로그램을 통해 타 부서 선배 변호사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백인인 선배 변호사는 "혹시라도 화상 회의할 때 상대방이 카메라를 켠다면, 너도 같이 켜거나 혹시 못 킬 사유가 있으면 왜 그런지 얘기하는 것이 보기 예의이다"라는 말을 했다. 순간 그 말을 듣고 뭔가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 명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 내가 최근 직장 동료나 상사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던 이유도, 그리고 내가 요즘 들어 회의나 일에 약간 흥미를 잃은 듯한 느낌도 바로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퇴근길에 운전을 하면서 마음가짐을 했다. 다음부터는 웬만한 화상 회의에서 한 명이라도 카메라를 켠 사람이 있다면, 나도 같이 카메라를 킬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출근(이라고 쓰고 로그인이라고 읽는다)을 하기 전에 어느 정도 머리를 정리하고, 옷도 수트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깔끔한 셔츠와 평범한 면바지 정도는 입어줘야 하겠다고 말이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위 다짐을 지켰더니, 왠지 옷을 반듯하게 입어서 그런지 업무에 임하는 자세도 조금 더 진지하고, 회의에서 사람들과 조금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주말에는 와이프와 오랜만에 쇼핑몰에 가서 정말 오랜만에 재택 출근용 셔츠를 몇 장 샀다. 다음 출근(로그인)이 벌써 기다려진다. 정말 옷이 날개인가 싶다.


새로산 재택 근무용 셔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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