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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Aug 05. 2023

교사가 되길 원하는 부모님과 다퉜던 ssul.


고3 시절 내 꿈은 영어교사였다. 단순히 영어라는 과목을 제일 좋아하고 잘했으며, 당시 부모님께서는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추천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생 사기업에 몸담으며 노동력 착취와 고용 불안을 체감하신 부모님 당신께는, 교사라는 직업의 안정성과 방학이 있다는 점이 부러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부모님은 내가 교대로 진학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원했고, 나는 사범대(영어교육과)에 진학하길 원했다. 아마 이 부분 때문에 대학 원서 쓸 당시에 큰 갈등이 있기도 했다. 부모님의 논리는 '초등 교사가 임용시험 경쟁률도 낮아서 합격하기가 쉽고, 중등학교처럼 야자나 입시에 신경 쓸 일도 적어서 업무도 더 편하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꺾지 않고, 점수를 많이 낮춰서 집 근처에 있는 지방 사범대 영어교육과에 진학을 했다. 일단 좋아하는 영어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다는 점과, '만에 하나 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영어 실력이 있으면 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영어교육과에 입학을 하니, 모든 교과 과정과 환경은 영어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최적화되어있었다. 전공 교수님들께서는 당연히 모든 졸업생이 영어 교사가 되길 원하셨고, 선후배 동기들은 졸업 후 영어교사가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마치 약대생이 졸업해서 약사가 되고, 의대생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영어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 3학년 때 참관 실습을 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범대 3학년이 되면 주변 학교로 참관 실습을 나간다. 4학년 때 나가는 교생 실습하고는 조금 다른데, 참관 실습은 흔히 선생님 한 분을 따라다니며(영어로는 쉐도잉이라고 한다) 교사의 생활과 업무가 어떤 것인지 간접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어느 남녀공학 중학교의 남자 영어 선생님에게 배정됐다. 그 선생님의 연세는 약 50세 정도로 인상이 매우 온화했고, 학생들을 애정과 사랑으로 대하는 흔히 "참 교사"라고 할만한 분이었다. 수업 준비도 꼼꼼하게 하시고, 실제 수업하실 때에도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겠다는 열정이 있으셨다. 성격도 매우 차분하시고, 선생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을 조곤조곤하고 부드럽게 하시는 편이었다.


그 선생님은 여자 중학생 반 수업을 맡으신다고 하셨다. 나는 이 선생님의 성격이나 열정으로 봤을 때, (특히 여)학생들에게 매우 인기 있고 존경받는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선생님을 따라 수업을 들어갔을 때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학생들이 이 선생님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온화하고 화를 안 내시는 선생님이다 보니 학생들은 그러한 선생님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수업 시간에 말을 안 듣는 것은 물론, 어떤 학생은 말대꾸를 하거나 대놓고 그 선생님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맡은 바 수업을 다하셨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나는 그 선생님이 분명 학생들의 불량한 태도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불평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때 선생님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포착한 감정은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슬픈 무기력감 혹은 패배감이 그 선생님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그 선생님의 얼굴에 30년 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 자체는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과연 교사가 되는 것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일을 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안정성, 방학, 연금 등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는 그날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임용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강력히 반대하셨다. 요약하면, '네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다. 교사(공무원) 되면 잘릴 걱정 없고 얼마나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지 모르냐. 방학 때는 해외여행도 다닐 수 있고, 퇴직하면 죽을 때까지 연금도 나온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 현장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한 번 마음먹고 나니 내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 그 일이 있은 후 약 12년 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교사가 아닌 채로 말이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순순히 부모님의 말을 듣고 교사가 됐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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