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사건을 맡으면 십중팔구는 증거가 명확해서 유무죄를 다투기보다는 오히려 최소 형량을 목표로 검사와 유죄협상을 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끔 정말 의뢰인이 무죄인 사건을 접하는데, 이때야말로 변호사의 역량이 발휘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원칙적으로는 이런 사건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검사의 거증책임에 따라 피고인이 본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무죄판결이 나와야 하지만 실상은 변호사가 검사가 가진 증거의 빈틈을 찾아내서 공격해야 간신히 무죄를 얻을 수 있다.
흔히 검사는 건물을 올려야 하는 건축가이고, 변호인은 건물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어 건물을 무너뜨리는 파괴 전문가라는 비유가 있다. (검사 출신이라고 형사 변호를 무조건 잘할 거라고 단정하기 이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경우 검사가 올리는 건물은 튼튼하다. 당연하다. 검사는 정부와 경찰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막대한 자본력과 영향력 가진 건축회사처럼 말이다. 그에 비하면 피고인은 대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특히 내가 주로 맡는 국선 사건 의뢰인들은 더욱 그렇다. 나는 그에 맞서서 단지 망치 한 자루(?) 들고 다니며 검사가 지은 건물을 무너뜨려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혹은 약해 보이는 부분을 툭툭 건드리며 "여기 이 부분을 몇 대만 때리면 건물 무너질 것 같은데 괜찮겠어?"라고 검사에게 알려주는 임무)
종종 빈틈없어 보이는 검사의 건물도 가끔은 빈틈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번이 그러했다.
의뢰인 A는 성매매 교사죄(Solicitation of Prostitution)로 기소되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범죄 구성요건 3가지 중에 하나가 부족했다. 참고로 버지니아 주의 성매매 교사죄(VA Code Section 18.2-346)는 (1) 피고인의 성매매 제의(offer), (2) 금전 혹은 비금전적 보상, 그리고 (3) 피고인의 성매매를 달성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substantial act)가 필요한데, 위 사건에서는 첫 번째 구성요소가 부족했다. 물론 그 외에 형식적 요건인 관할권(jurisdiction)과 재판지(venue)도 다툼의 여지가 있었다.
재판 당일 검사와 협상 전에 담당 경찰관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담당 경찰관은 이 부분을 잘 모르고 기소했던 것 같다. (미국은 경찰도 기소권을 가지고 있다) 단지 당사자간의 성매매에 관한 합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찰은 여전히 내 의뢰인이 무언가 불법을 저지르긴 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이후 검사와 협상을 하게 되었고, 나는 범죄의 첫 번째 구성요소가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검사가 공소취소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담당 경찰관과 더 자세히 얘기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전에 법원 복도에서 얘기했던 담당 경찰관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런데 경찰관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법정에 가 있나 싶어서 같은 층에 있는 다른 법정을 찾아봤는데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알고 보니 해당 경찰관은 아래층에 있는 교통 법원에도 출석해야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교통 법원에서 해당 경찰관을 찾아서 검사한테 가라고 말해주고 다시 검사 대기실 밖에서 기다렸다. 애초에 사건 배정은 9시 30분이었는데,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초초해진 의뢰인은 도대체 언제 끝나냐고 5분마다 내게 보채는 듯한 시선을 보내곤 했었다. 한여름이라 법원은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는데 등에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검사는 담당 경찰관으로부터 사실 관계를 재확인했고, 2차 협상을 위해 검사와 마주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초해하는 의뢰인을 상대하다 보니 나도 좌불안석이었다. 마지막으로 내 의뢰인은 범죄 기록이 없는 선량한 시민이며, 상대방 여성은 무단침입 및 기타 전과가 있는 노숙자라서 진술에 신뢰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검사는 "그 여자의 과거는 난 알지도 못하고, 알았더라도 본 사건과 무관하니 언급하지 마세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물론 나도 '신원조회를 해보고 전과가 있으면 유죄추정을 해버리는 당신들이 항상 하는 짓이 아닌가'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때가 아닌 것 같아서 참았다. 뭔가 1차 협상 때와는 달리 검사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희망의 빛을 본 나는 마지막으로 검사에게 성매매 제의가 의뢰인이 아니라 상대방 여성으로부터 왔다는 점을 재강조했다. 그러자 검사는 다시 법전을 펼쳐서 해당 조항을 주의 깊게 읽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이다. 왜냐면 나는 이미 해당 법 조항을 수십 번 읽어봤고, 이 조항을 정확히 적용한다면 범죄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항을 꼼꼼하게 읽은 검사는 한 10초간 깊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대답했다. "Okay" 그리고 형사 합의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 "Okay"의 뜻이 공소취소를 하겠다는 의미인지는 불확실했지만 그 어조와 합의서를 작성하는 모양이 뭔가를 단념한 듯한 느낌이라 공소취소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걸 굳이 확인함으로써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진 않았다. 검사가 마음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분히 검사가 형사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 기다렸다.
형사 합의서는 파란색 종이인데 아랫부분에 "공소취소(Nolle Prosequi)"에 체크하는 부분이 있다. 일반적인 유죄협상이라면 "유죄 인정(plead guilty)"라는 부분에 체크가 있었을 텐데, 합의서를 받아 들고 보니 "공소취소"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명백한 확인의 순간이었다.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몰려왔다.
기쁜 마음으로 합의서를 들고 법정 맨 뒷줄에 초조하게 앉아있는 의뢰인에게 갔다. 두 시간 가량 초초하게 기다려서 그런지 그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왠지 "당신은 오늘 감옥에 갑니다"라고 해도 그냥 담담하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니 순간 의뢰인에게 "협상이 잘 안됐다"며 농담하고 싶었는데, 초주검을 하고 있는 의뢰인 얼굴을 본 후 그냥 솔직하게 검사가 공소취소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뭔가 기쁨의 환호 같은 걸 기대했지만, 의뢰인은 워낙 지쳐서인지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합의서를 판사에게 제출하고, 판사가 공식적으로 공소취소를 받아들인 순간 의뢰인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평소보다 오래 걸리고 마음도 더 졸였던 사건이지만 결국 잘 해결되어서 기뻤다. 예전에도 내가 맡았던 사건들 중에서 공소 취소된 것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검사를 설득해서 직접 공소취소를 얻어낸 건 처음이라 그 기쁨은 더욱 컸다. 형사 사건을 접하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은데, 이렇게 종종 무고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얻는 보람 때문에 계속 형사 사건을 맡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글: 김정균 변호사(버지니아/DC/뉴욕 주 변호사)
Ballston Legal PLLC 대표 변호사 (www.ballstonlegal.com)
Meta Law School Coach 대표 코치 (www.metalawcoa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