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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Nov 20. 2015

3. 기억의 습작

나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유명한 뮤지션들이 가끔 "이 노래는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5분 만에 바로 썼어요"라고 얘기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정도로 대단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나도 맘먹고 쓰려면 전혀 진전이 안되다가도, 아무 때도 아닐 때 갑자기 글이 막 떠올라서 긴 글을 술술 쓸 때도 있다. 원고료를 받고 글을 쓰게 되면서 '마감'의 마법에 빠져 없던 영감도 끄집어 내는 능력을 강제로 갖게 된 지금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런 글에 대한 영감은 특히 자기 전에, 더 정확히 말해서 자려고 침대에 누워 아직 잠이 들기 직전에 가장 많이 떠오른다. 아마 내가 그동안 이 시간에 머리로 썼던 글들을 빼놓지 않고 모았다면 책을 몇 권은 쉽게 완성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가끔은 자려다가 다시 일어나서 글로 옮겨 적는 일들도 있는데 대부분은 한 번씩 더 생각해보고 '내일 다시 써야지'하는 편이다.


몇몇 표현들에서 눈치챌 수 있었겠지만 이 자리에 누워 떠올리는 수준은 단순히 주제나 소재를 연상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100%의 완성된 글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니까 노트북이나 펜으로 옮겨 적지 않았다 뿐이지 거의 이와 똑같은 글을 다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아니, 가끔은 이렇게 옮겨 적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물렀던 완작 아닌 습작 중에 더 좋은 글들이 많았던 것 같다. 뭐, 이건 내  머릿속에서 나만 경험한 일이니 증명할 수 없지만 내 경험상으로는 분명 그렇다.


가끔 이렇게  머릿속에서 한 번 끝까지 다 썼던 글을 옮겨 적으려 할 때, 단순한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반복적 기운 때문에 쓰지 못한 경우들도 많다. 음... 일종의 도미노를 쌓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머릿속에서 끝까지 다 써 내려갔던 글을 다시 옮겨 적는 일은 마치 한 참을 세웠다가 실수로 쓰러트린 도미노를 다시 처음부터 세우는 일과 같이 느껴져서 기운이 빠지는 일이 많다. 그래서 아예 다시 글쓰기를 포기하게 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먼 미래에 누군가가 머리로 생각만 해도 데이터화 되는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을 기다려 본다. 아마 이런 기술이 있었다면 내가 쓰는 글들은 지금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좋은 글들을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 본다. 그 만큼 눈을 감고 누운 채로  머릿속으로 써 내려갔던 주옥 같은 글들이 참 많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하는 귀차니즘을 극복해 내면 어느 정도 생존이 가능하지만, 이건 단순한 기억에 문제를 뛰어 넘어서 처음 쓰는 글이 제일 마음에 드는 경우이기 때문에  부지런해진다고 해도 온전히 모두를 살려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면 인간 승리의 자기합리화다).


그런데 그럼에도 또 자기 전에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쓰지 않고 내 기억의 능력을 과신한 채 내일을 기약하며 잠들곤 한다. 하지만 다음 날은 역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글 역시  어젯밤 괜찮은 주제를 가지고 거의 몇 페이지 짜리 글을 술술  머릿속으로 써 내려갔었는데,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전부 기억나지 않아 그 익숙한 당혹감에 쓰는 글이다. 과연 언제쯤이면 이 기억의 습작을 다 현실로 불러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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