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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Nov 23. 2015

4. 에스프레소의 추억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날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를 처음 마셨던 날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처음 마셨던 커피는 무려 에스프레소였다. 이 유러피안 같은 추억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잘 모르는 것들도 잘 안다고 얘기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예를 들면 누구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은 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이지만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의 입장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전문용어들이 있기 마련인데, 난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르는 말들도 아는 것처럼 받아 쳤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런 아는 척을 거의 들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단어는 모르지만 단어 앞 뒤로 위치한 화술 덕분에 진짜 아는 것처럼 대부분 들렸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버릇이었다. 특별히 못 배운 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못 배운 취급을 당했던 트라우마를 겪는 것도 아니었고, 반드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여하튼 그랬다. 


처음 커피를 마실 때도 그랬다. 이 에스프레소의 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아니면 나만 느낄 수 있었던 당황스러움의 크기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 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극장에서 종로 3가 역 쪽으로 걸어나와 오른 편에 위치한 어떤 커피  가게였는데, 아마도 회사 동료들과 퇴근을 하고 근처 음반 가게에 음반을 사러 왔었던 것 같다 (이 때는 이 거리에 음반과 DVD를 파는 가게 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렇게 음반을 구경하고는 커피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여자 동료가 먼저 커피를 시키고 나서 나한테 '너는 뭐 마실래?'라고 묻기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에스프레소'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어? 너 에스프레소 마셔?'라고 다시 묻길래, 이번엔 조금 정신은 차렸지만 또 한 번 '응, 자주 마셔'라고 대답했고, 여자 동료는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은 채 본인의 것으로 아마도 라떼와 내 것으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재미있는 건 이 때 여자  동료뿐만 아니라 주문하고 나서 커피 가게의 점원도 '에스프레소 맞으시죠?'라고 한 번 더 물어봤던 것 같다.  그때 내 나이가 20대 초반이기도 했고, 누가 봐도 에스프레소 마시게는 생기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나왔는데, 나는  점원으로부터 커피를 건네 받은 순간 속으로 바로 당황했다. 왜냐하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이 무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보통 같으면 여기서 '어? 이거 잘 못 나왔는데요?'라고 말해서 들켰을 텐데, 나는 속으로는 몹시 당황했지만 무슨 임기응변이지 겉으로는 전혀 놀라지 않은 척 하며 한 모금을 자연스레 마셨다.  그때 그 여자 동료의 말도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어, 이거 너무 양이 적은 거 아니야? 이것만 마셔도 돼?'라고 물었고, 나는 '응,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사실 에스프레소는 물론 커피를 처음 주문해 본 것을 들키지는 않았지만, 이 때 커피를 주문했던 건 추위도 달래고 제법 길게 손을 녹이려고 주문했었던 것 같은데, 에스프레소가 너무 적은 양이라 한 두 세 모금 만에 다 마시고는 동료가 라떼를 다 마실 때 까지 꽤 긴 시간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그리고 처음 받아 들었을 때 적은 양으로 놀랐다면 한 모금 마시고 너무 쓴 맛에 놀랐었는데, 이것도 또 무슨 임기응변인지 전혀 표정에 이 쓴 맛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날 이후 다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게 된 것은 거의 10년 정도 뒤였던 것 같다. 물론 이 때는 정확히 알고 주문했다. 이렇게 조금은 당황스럽게 시작한 커피는 언제부턴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 혈관엔 아메리카노가 흐른다고 말할 정도로 하루에도 여러 잔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편이고, 한 때는 국가 별로 마셔본다고  이것저것 마셔보기도 했으며, 요 몇 년 사이는 드립 커피에 맛에 빠져서 이런 저런 드립 장비들을 구입해 원두도 직접 사서 다양하게 맛보고 있다. 또 어디 여행을 가거나 아주 피곤할 때 맥주 한 잔, 소주 한 잔 보다 더 자주 커피 한 잔이 떠오를 때가 많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최초의 인셉션은 부모님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꼭 밥을 먹고 나서 커피 한 잔을 마셨고,  그때마다 나도 한 잔씩 같이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던 것 같다. 솔직히 요즘엔 보여주는 맛도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마시기도 한다. 예쁜 잔과 드립기들을 세팅해 놓고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리면, 솔직히 그냥 뿌듯해지기도 한다. 지금도 드립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며 이 글을 쓴다. 처음엔 어느 정도 허세가 가미되었던 커피가 어느 덧 자연스러워졌다.  


마지막으로 커피 얘기하다 보니 생각난 사진 한 장. 영화나 미드 보다 보면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이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그 자리에 돈만 던져두고 나오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파리 갔을 때 드디어 해보고는 혼자 뿌듯해서 찍었던 사진.  나 참 이런 거 좋아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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