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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Nov 30. 2015

7. 송곳

반드시 한 명은 뚫고 나온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을 드라마화 한 동명 드라마가 끝이 났다. 웹툰 때도 강렬하게 보았던 '송곳'의 날카로움은 드라마에서도 여전했다. 내가 '송곳'을 보고, 그리고 이 시점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접하게 되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송곳'의 배경은 한 대형마트다. 그리고 여기서 불합리하게  해고당하거나  회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여 이수인 과장을 비롯한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힘든 투쟁을 이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송곳'이 비슷한 이야기를 다뤘던 다른 작품들보다 더 날카로운 점은 이 닥친 현실의 문제를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현장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던 이들이 보아도 '저건 드라마니까 그렇지'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노사의 대립에 관한 흑백의 시선이 아닌 그 안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처한 상황을 들어 어느 한 명 쉽게 욕하거나 혹은 '저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구조를 묘사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역시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이수인의 이야기와 하나의 목적으로 뭉친 공동체가 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 중에 겪게 되는 내부 갈등에 대한 치밀한 묘사였다. 후자부터 먼저 간단히 얘기하자면, 실제로 주변에서 이런 비슷한 문제로  상처받는 경우를 많이 보고 들었던 터라, '송곳'의 현실 인식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후반부 파업에 까지 이르게 되면서 이런 갈등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모두를 위한 일이 결국 개인의 일을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있어서 세기의 차이의 의견 대립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떤 결정들을 했었나  되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내 가슴을 송곳처럼 콕콕 찔렀던 건 역시 이수인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였다. 나는 이수인과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실패한 이수인 혹은 남들은 그나마 이수인 인 줄도 몰랐던, 시작도 못해 본 이수인에 가까운데, 그의 작은 성공들과 실패들을 보면서 진심으로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한 이가 스스로 빠지게 되는 수 많은 함정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팠다. 이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대사처럼, 그걸 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알면서도 또 그 길을 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랬다 (이 얘기를 다하자면 책 한 권이 나올 듯).


글 서두에 얘기했던 것처럼, 내가 '송곳'을 통해 최근 조금 생각이 달라지게 된 점이 있는데, 지금도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달라졌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하기에 한 번 집고 넘어가고 싶었다.


나는 비정규직이나 취직을 못한 취준생들을 일종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배부른 소리를 하는 이들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취업준비생들의 경우 자신들의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 때문에 그의 상응하는 직장을 찾고자 눈이 높아진 탓에 쉽게 직장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눈을 낮추거나 아주  밑에서부터 시작하면 가능한 일들이 충분히 있는데 스스로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시선도 아주 호의적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계약상으로는 문제가 없고,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모르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비정규직인 것으로 회사와 본인이 모두 동의한 계약이었고, 비정규직 계약이 끝나면 정규직 전환을 100% 약속한 계약도 아니었는데 이를 가지고 부당하다고 싸우는 것은 반대로 악착같이 정규직이 되고자 노력한 이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달갑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정규직 법을 악용해 계속 싼 임금의 비정규직만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회사가 결코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하지 않는 것이 곧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로 나는 가끔 엄청난 이자의 사채를 빌려 썼다가 값지 못해 이를 두고 사채 업자를 고발하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도 곱지 못한 시선을 갖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빌려 쓴 당사자가 스스로 동의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성격상 이런 계약서에 싸인 했다면 싸인 하기 전까지만 고민하지, 그 이후엔 내가 싸인 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하는 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같이 생각하게 된 이유는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주 개인적인 경험들, 고통을 이겨내야 했던 시간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도 가지 않았으며 넉넉한 형편도 아니어서 수능  다음날부터 바로 아르바이트로 내 돈은 내가 벌어 독립을 했어야 했는데, 처음 회사를 입사할 때도 당연히 경력이나 학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하여  인정받고, 정직원이 되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다른 회사에 입사하고 또 다음 스텝으로 진행하는 과정 들을 겪어 왔다. 당연히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나는 비교적 열려 있는 젊은 회사들을 다녀서 학벌 등으로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것이 나 보다는 상대나 동료에게 부담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를 테면 거래처 담당자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나이를 묻는 일이 있었는데 다들 '몇 년 생이세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몇 학번 이세요?'라고 할 때 고졸이라고 꼭 집어 얘기해야 할 때는, 매번 부가 설명을 해야 해서 좀 불편하긴 했었다. 단순하게 말해서 매번 스스로 다시 증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학력이나 경제적인 측면 등 에서 혼자 해쳐나와야 했던 시간을 오래 견뎌오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불만이 생겼던 것 같다 (는 생각을 요 몇 년 사이 하게 되었다). 즉, 나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있는 이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들이 그저 배부른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이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도 있는데 그건 너무 쉽게 하는 불만 아니야? 같은 거다.

그런데 '송곳'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그리고 난 이 부분이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싸움을 대단한 악당과 소시민의 싸움 구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와 시시한 강자의 싸움으로 묘사한 점 말이다. 생각해보면 힘든 일을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과장하거나 혹은 대의를 중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까지 하느냐 라는 핀잔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회사가 뭐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해서 다녀야겠냐. 더러우면 그냥 내가 나오면 그만이지 뭘. 그렇게 싸워서 이기면 또 무슨 의미가 있나. 같은.


그런데 '송곳'은 이런 시각으로 보았을 땐 그저 안 해도 그만인 시시한 싸움이 과연 중요하지 않은 일인가를 묻는다. 푸르미라는 회사가 부당한 대우를 하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바로 일할 수 있는 업무라면 굳이 월급도 못 받고, 매일 얼굴 보는 사람들과 싸워가며 회사를 다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이 작품은 '그래도 해야  돼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법적으로만 문제가 없다면 그냥 수긍해야 하는 것이 아닌. 잘한 것이 아니라고 잘못 한게 아닌 것처럼, 잘못한 것이 경쟁에서 뒤졌거나 혹은 정말 상대적으로 잘하지 못한 것이 과연  질책받거나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를 재차 묻는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부터 경쟁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능력이 떨어져서 경쟁에 뒤쳐지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뒤쳐진 이들을 자연스럽게 패배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자신이 싸인했으니 말도 안 되는 이자를 어떻게든 갚아내야만 하고,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노력이나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으니 패배를 고스란히 인정해야만 하고, 비정규직으로  처음부터 고용되었으니 정규직이 못 되더라도 그냥 순순히 인정해야만 하는. 한 편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는 없는 다른 한 편의 일들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너무 쉽게 인정해 버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공생에 관한 것도 아니고, 성공과 실패의 관한 것도 아니다. 앞서 패배라는 단어를 몇 번 쓰게 되어 불편했는데, 이건 결코 패자에게 박수를 쳐주자 라는 것이 아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 가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웠다.

패자가 되지 말자. 부당함에 맞서 반드시 이겨내자. 더 큰 용기를 갖자. 이런 것들로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송곳'의 메시지는 정말 아주 가늘고 깊고 날카로웠다. 더 커다랗고 큰 면적의 망치 같은 도구였다면 더 많은 이들의 가슴을 강하게 때릴 수 있었겠지만, 이 날카로운 송곳은 아마 훨씬 더 적은 수의 사람의 가슴에 박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달하게 되면 반드시 한 명은 뚫고 나올 것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작은 시작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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