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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Nov 30. 2015

6. 인류보완계획

결국 지금의 인류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글 쓰는 일을 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이 일에는 '마감'이라는 기한이 있는데 여기에는 놀라운 두 가지의 초자연적 현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마감이 턱 밑까지 닥치게 되면 없던 영감도 떠올라 장문의 글도 술술 써 내려가게 되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이 나를 쓰는 것인지 불분명한 무의식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평소에 아무  문제없이 잘 하던 사람도 마감이라는 것이 존재하면 바로 이 마감이 직전에 닥치기 전까지 여유를 부리다가 결국 닥쳐서야 무의식을 빌려서 완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무언가 닥쳐야만, 자극이 있어야만 실행이 가능하다는 건데 이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 겨울에 얼음 깨고 들어가서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치고 나서야 어떤 결심을 하거나 실행에 옮기곤 하는, 일종의 극기 훈련을 통한 실행에 관한 것인데, 그렇게 까지 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혹은 자존심) 때문이다. 살을 에는 고통의 자극 없이도 굳게  마음먹는 것 만으로 결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오히려 실제 그 자극 때문에 영향을 받는 다기 보다는, 자극이 반드시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일종의 사회화 프로그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언제부턴가 항상 있어왔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직접 경험한 '마감'이라는 매직은 고유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 동일한 경우는 여러 곳에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방학 숙제는 긴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면 아주 여유 있게 완료할 수 있는 분량이지만 방학 내내 놀다가 결국 개학 바로 전날에야 완료하게 되는 것도 그렇고, 설거지나 청소 같은 것들도 매일 아주 조금씩만 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꼭 일이 될 때까지 쌓아둬서 결국 엄청난 결심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도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 만큼 지금까지는 비교적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이나 시간을 분배하며 살아온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일 같은 것도 대부분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속 시원한 편이었고. 그런데 설거지나 청소는 예외였다. 그런데 이 글 중반에서야 깨닫게 된 점은 따져보니 나도 대부분 모든 일을 닥쳐서야 해왔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인 줄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글로 정리하며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 예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글을 써봐야 된다). 그렇게 인정하고 보니 더 자존심이 상한 달까.


나는 회사를 다닐 때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아니, 하루 종일 회사에 있었으면서 언제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하세요?' '아니 그 시간에 퇴근해서 언제 글도 쓰고, 새벽에 축구도 보고 하는 거예요?' '잠은 안 자세요?' 등등. 남들보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특히 관심사도 많은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 속에서도 결코 이런 것들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자주 했던 말인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을 해도 만약 그 날 그대로 잠든다면 그 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라도 해야. 글이라도 하나 쓰거나 영화라도 하나 봐야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나름 열심히 열정적으로 여러 가지를 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것들이 내게는 글 처음에 언급한 한 겨울에 얼음 깨고 들어가는 일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극한의 회사 생활 말이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면, 회사를 관두고 나서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졌음에도 나의 생산적인 활동은 결코 그 여유로운 시간만큼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효율로 따지면 굉장히 비효율적이며, 오히려 절대적인 양이나 질로 봐도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할 때보다도 떨어지는 경우도 잦아졌다. 회사 생활로 몹시 피곤한 와중에는 '이렇게 그냥 하루를 끝낼 순 없어!'라는 생각에 더 열정적으로 임했었는데, 정반대로 시간이  남아도는 요즘에는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다가 결국 해야 할 일도 넘겨 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고양이 화장실 청소도 그렇고, 설거지도 마찬가지고, 집 청소도 물론이고,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운동은 해야지 매일 다짐하지만 바쁠 때보다도 더 못하고 있고, 여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다이어트는 계속 실패해서 몸무게는 계속 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하고 무력해진 느낌이다. 무력 무력 열매를 먹었나.


예전 같으면 아무 계기 없이도 단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 자리에서 '딱!' 결심하고는 고쳐가는 일이 많았었는데 요새는 확실히  느슨해지고 무엇보다 많이 무력해졌다. 아니,  무력해졌다기보다는 무력한 것에 익숙해졌달까. 예전엔 허투루 보내는 몇 시간도 아까워서 안달이었는데 요새는 나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해져서 '괜찮아, 괜찮아'하며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물론, 나는 회사를 관두면서 한 동안은 시간을  흘려보내리라 오히려 결심했었다. 내게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꼭 필요했고, 무력해질 만큼의 여유도 필요했다. 그런데 '나는 다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맹신했던 것이 역시나 문제였다 (대부분 이게 문제다). 결국 적당히 하고 빠져나와야지 했던 것은, 앞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어지고 익숙해졌다.


정말 초등학교 때처럼 하루 시간표라도 작성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걸까. 인류보완계획 없이는 이대로의 인류로는 해결 못하는 걸까? 꼭 내 문제에 인류까지 들먹이지 않고서는 스스로 정당하지 못한 걸까? 아니 잠깐만. 인류보완계획도 먼저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면 이것도 똑같....

어서 여기서  빠져나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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