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강요 없는연대에 대해
널리 희망적인 의미로 통용되나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 바로 '극복'.
어려움이나 고난, 장애 등을 이겨내는 것을 흔히 극복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보통은 극복하기 어려운 일들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일련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어떤 극복의 과정은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떤 극복의 과정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가끔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달해야만 '극복'이라는 것을 이뤄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난이도로 따지자면 가장 높은 수준의 어려움이 동반되는 '극복'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살면서 흔히 사용한다. 특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가 극복이라는 단어를 언제부턴가 긍정이 아닌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너무 쉽게 극복을 강요하는 사회. 마치 극복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거나 심지어 잘못이라고 까지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회는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극복을 강요한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것이 무조건 적으로 선행되기 때문에 그 과정은 쉽게 건너뛰고, 오로지 문제를 극복할 것만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런 강요를 당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 문제를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 되묻게 된다. 내가 이겨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이 사회에 일원으로 계속 함께하기 위해 그들의 강요에 못 이겨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클로이 자오)과 여우주연상 (프랜시스 맥도먼드)을 수상한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 2020)'는 경제적으로 사회가 붕괴하며 터전과 가족을 잃고 낯선 길에서 생활하며 겪게 되는 주인공 '펀'의 이야기를 그린다. 펀은 삶의 터전을 떠나 오래된 밴에서 생활하며 자신과 같이 정착하지 않고 길에서 살아가는 21세기 유목민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을 통해 그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위안을 얻게 된다.
앞서 영화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극복'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했던 건 바로 펀의 여정이 보여준 사회의 성숙함 때문이다. 클로이 자오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장면들이 너무 시네마틱 하게 느껴져서인지는 몰라도, 펀이 겪는 이야기들은 마치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여성의 몸으로 홀로 거리 위 밴에서 지내는 생활은 몹시 위태로워 보이지만 실제로 위협적인 순간들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펀과 같은 유목민들은 모두 정처 없이 떠돌지만 서로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아도 종종 다시 마주치고, 다시 관계를 맺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자신의 길로 떠나가기를 반복한다. 길 위에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문장은 이들에겐 공허한 것이 아니라 마치 필연적인 것만 같다. 느슨하지만 연대하고 있고, 무심한 듯 하지만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들은 그 누구도, 심지어 펀의 가족마저도 펀에게 빨리 가족에게 돌아와 정착하거나 혹은 유랑 생활을 끝내고 남편을 잃은 상실에서 극복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상실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커다란 마음의 구멍이 생긴 것인지 각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위로하거나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가끔 서로가 필요로 할 때 만나고 또 우연히 스쳐 지나면서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펀이 스스로 이겨낼 준비와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될 때까지 말이다.
'노매드랜드'를 보고 나서 나는 혹시 누군가에게 이런 긴 여정이 반드시 필요한 상처와 상실에 대해 너무 쉽게 극복을 강요하지 않았는지 자문해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을지도 다시 되내어 본다.
* 이런 영화를 만든 클로이 자오의 다음 작품이 무려 마블의 '이터널스'라니. 어떤 영화일지 몹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