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요소를 절제하며 엮어낸 훌륭한 데뷔작!
이정재 배우의 감독 데뷔작 '헌트 (HUNT , 2022)'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영화다. 일단 한국영화가 '태양은 없다 (1998)' 이후 오랜 시간 기다려온 이정재, 정우성 배우의 동반 출연작이다. 두 배우도 이미 오래전부터 다시 같은 영화에서 만나길 고대해왔는데 그것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또 그 영화가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일 줄은 아마 몰랐을 거다. 두 배우의 재회 만으로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기대치가 높은 만남이었기에 큰 부담이었을 텐데 (거기에다 전혀 연출 경험이 없던 이정재 배우의 첫 연출작이자 시나리오까지 쓰게 된 부담까지), 익숙하지만 흥미로운 요소들을 이 한 편의 영화 안에 잘 녹여냈다.
'헌트'는 8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대통령 암살 작전을 두고 내부의 스파이를 찾는 시대극이자 스파이 첩보 액션 영화다. 그리고 두 주연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가 정확히 비중을 양분하는, 극 중 첩자인 '동림'이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둘 중 누구인가 역시 정확히 절반의 의심과 신뢰로 쌓아가는 아주 명확한 두 인물의 영화다. '헌트'를 이루고 있는 것들, 시대적 배경, 장르적 특성, 캐릭터, 영화적 리듬까지 각각의 것들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우리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해 익숙한 것들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계속 강강강강으로 진행되어 만족스럽다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나는 오히려 이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단 한 가지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치고 나가지 않고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절제가 결국 이 완성도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0년대와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후반부 등장하는 아웅산 테러를 연상시키는 구성까지, 보는 이에 따라 (연령에 따라) 실제로 겪었던 역사 속 사실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 많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한 픽션이라 부를 수도 없는 약간은 중간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에 대해 이정재 감독은 이 여러 겹의 레이어를 관객이 다 알지 못해도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고 레이어를 이해하면 조금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은근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도록 레이어를 구성하는 것이 감독으로서(그것도 데뷔작을 연출하는) 억제하기 힘든 욕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 레이어를 전부 기획하고 구성한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이걸 어떻게든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래서 본인의 의도를 더 직접적으로 풍성하게 전달하려는) 욕구가 있을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정재 감독은 데뷔작이라는 것이 (그리고 연출을 전혀 할 생각이 없었으나 이 프로젝트가 더 지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출을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감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하게 이 이야기를 구성했다.
장르적으로는 누가 '동림'인가의 관한 의문과 추적을 중반 이후까지 매끄럽게 끌고 나가고, 밝혀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영화가 박평호와 김정도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액션 클라이맥스와 함께 마무리한다. 결국 두 인물의 각기 다른 신념이 하나의 사건에서 만나 협동하거나 실패하는 이야기인데, 보통 같았으면 이 신념을 관객에게 각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영화가 처음부터 빌드업을 진행했을 텐데, '헌트'에는 첩자를 찾기 위한 장르적 구성만 있을 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물들의 동기가 되는 신념에 관한 빌드업이 사실상 없다. 이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두 인물의 신념이 국내 관객이라면 몇 마디 대사나 상황만으로도 쉽게 이해, 공감이 가능한 익숙한 것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는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을 통해 그 전후 사정까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첩자처럼 영화 내내 신념을 숨기고 있다가 말미의 진심이 밝혀지더라도 그 에너지가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헌트'를 액션 오락영화로서 매력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점이라 생각된다. 옅게 깔려 있는 레이어의 구성은 몰라도 되는. 하지만 관심 있고 발견해 낸 관객들은 조금 더 깊은 의미도 찾아볼 수 있게 만드는. 그 정도의 묘미를 잘 살려냈다.
안타깝게도 현재로서 이정재 배우는 감독으로서 차기작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깔끔한 상업 영화를 만드는 신인 감독 한 명을 이대로 잃기엔 너무 아쉽다. 꼭 나중에 좋은 기회가 맞물려 두 번째 연출작을 만나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