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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Jul 23. 2022

썸머 필름을 타고!

좋아하는 것은 힘이 된다!

© 싸이더스


썸머 필름을 타고! (It's a Summer Film!, サマーフィルムにのって , 2020)

좋아하는 것은 힘이 된다!


슬럼프는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너무 열심히 했을 때도, 갈피를 잡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도, 끝에는 종종 슬럼프가 오곤 한다. 내 경우는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근 다시 슬럼프가 왔다. 좋아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나서 한참을 신나게 달렸다. 모두 좋기만 한 건 아니었으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쳐내며 버텨내고 그 보상을 얻는 것에 만족했던 회사생활에 비하면, 이름처럼 '좋아하는 (favorite)' 것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은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4주년을 며칠 앞둔 요즘 쉽사리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통은 며칠 고생하고 나면 자력으로든, 무언가 예상치 못했던 외력으로든 은근슬쩍 벗어나곤 했는데 이번엔 좀처럼 자력으로도 우연으로도 탈출하지 못하던 중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터였다. 


무언가 초심을 떠올릴 만한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영화 한 편의 제목과 포스터를 우연히 보게 됐다. 청춘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세 명의 여학생이 학교 옥상처럼 보이는 곳에서 마치 본인들이 스스로 일으킨 것 같은 바람을 맞으며 외치고 있는 포스터의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였다. 간단한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니 학교 축제를 맞아 직접 영화를 만들게 되는 이야기란다. 청춘, 여름, 학교, 영화 여기에 나중에 알게 됐지만 SF까지. 가끔 실패하는 적도 있지만 이런 조합이라면 어지간해서 좋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본래도 이런 장르의 영화를 무척 사랑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영화라는 촉이 바로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영화를 보기 힘든 지방의 현실이지만, 이 영화는 더 많은 수고를 해서라도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촉은 틀리지 않았다. '썸머 필름을 타고!'는 내가 찾고 싶던 초심, 바로 '좋아하는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가슴 뛰는 영화였다.


© 싸이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는 언제나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건 대부분 감독 스스로의 고백이자 영화 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순수하고 뜨거운 고백이기 때문이다. 마츠모토 소우시 감독의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 (It's a Summer Film!, サマーフィルムにのって , 2020)'에는 '왜 내가 영화를 좋아했지?'라는 질문에 대한 꾸밈없는 대답이 담겨 있다. 그 대답은 몰랐던 사실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되었거나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을 뿐. 이 영화는 애초에 없던 감정을 처음부터 만들어내 고조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때는 활활 타올랐으나 꺼질 듯 불씨만 남아있는 장작에 바람 길을 만들어 다시금 불을 지필뿐이다. 그렇게 다시 타오르게 만들더니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이 모든 불씨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양 크게 타올라 꺼지지 않은 채로 뜨겁게 막을 내린다. 서서히 불을 지피던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 전력을 다해 불타오르는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이 찌릿찌릿해질 정도였다. 마츠모토 소우시 감독은 인터뷰에서 라스트신을 만들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다름없다고도 했는데,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마지막이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다른 감정들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이 줄어든다. 거의 없어지다시피.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단 하나의 좋아하는 마음, 그러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뭉쳐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 만은 않다. 모두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뭉치게 된 것은 맞지만 모두 영화를 만들기 위한 사명(혹은 희망)으로 모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 만으로 뭉친 그룹은 맨발(이토 마리카)의 영화 촬영지마다 등장하는 동급생의 다른 영화 부원들이다. 그들은 영화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훨씬 더 일사불란하고 효율적이며 또 에너지 넘치게 활동한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보통 같았으면 라이벌 성격이 강해 일종의 악역처럼 그려질 영화부의 활동과 마음을 전혀 퇴색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라이벌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상 같은 마음(좋아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마지막에 가서 맨발은 깨닫게 되고 이를 자신의 영화에도 힘으로 활용한다. 


© 싸이더스


맨발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무라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마음 하나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항상 함께 하는 친구 킥보드 (카와이 유미)와 블루 하와이(이노리 키라라)는 겉으론 맨발과 같은 마음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좋아하는 마음은 방향이 조금 다르다. 킥보드는 맨발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으로 함께 하고 있고, 블루 하와이 역시 세 명의 우정 때문이지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은 셋 중 가장 덜한 편이다. 나중에 함께 하게 되는 멤버들도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이들이라고 봐야 할 텐데, 함께하는 것 자체에 마음이 이끌린 경우다. 그리고 얼떨결에 주연을 맡게 되는 린타로(카네코 다이치)의 경우 나중에 밝혀지는 것처럼 조금은 복잡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모두의 마음이 영화 만들기라는 커다란 에너지로 융합된다. 이 과정 중에 각자의 마음은 가끔 엇나가기도 하지만 결국 본래 이 그룹에 함께 하게 되었던 마음, 그 좋아하는 마음의 에너지로 끝까지 밀어붙여 세상에 없던 (이 표현은 이 영화에서 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좋은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보고 나서 그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어지는 영화, 다른 하나는 보고 나서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지는 영화다. '썸머 필름을 타고!'는 전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는 이 글에서 거의 하지 않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쓴 마음과 에너지가 그대로 전해져 영화를 본 나 역시 그들처럼 좋아하는 무엇(이 경우엔 영화(cinema))에 대해 떠올리게 됐고 다시금 말하고 싶어졌다. 글의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슬럼프를 겪던 중에 이 영화만큼 완벽한 영화는 없었다. 다시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은 힘이 생겼다. 잠시 빌려왔다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힘이다.


© 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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