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올해는 지난해와 다르게 예전처럼 부지런히 영화를 챙겨봐야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새해 첫날 무슨 영화라도 봐야지 싶어 지난해 보고 싶었으나 놓쳤던 작품들을 고르던 중 유재선 감독의 '잠'이 떠올랐다. 최근 안타까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죽음을 맞은 이선균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라 애써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결국 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 이후 이 영화를 처음 보게 된 나는, 영화 '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고 어쩔 수 없이 내게 있어 영화 '잠'은 영화가 갖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아니 영화는 본래 갖고 있지 않았던 고통을 보는 내내 느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기 이전에 그래도 어렵사리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유재선 감독은 데뷔작 답지 않게 노련하게 절제하고 장르적 클리셰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적은 인물들과 제한적 공간을 제약이 아닌 장점으로 활용하는 영리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흥미를 느낀 나는 갑자기 '왜 우리나라에는 샤말란 같은 감독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건 초반부터 바로 그 '샤말란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의 이야기가 끝까지 힘을 가지려면 관객이 시종일관 불안과 의심을 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점에서 완벽하게 성공적이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아주 명확한 한 가지 이야기인데, 의심하면 할수록 충분히 그 의심이 스스로 납득될 정도의 여지를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여러 레이어도 아니고 딱 한 가지 큰 의심의 레이어를 깔았을 뿐인데, 그로 인해 이 이야기는 장르적으로도 풍성해졌고 스토리 측면으로도 가진 것 이상으로 깊어졌다. 작지만 명확한 복선들을 깔아 둔 것도 좋았고, 오컬트 적인 묘사를 할 때 아주 짧지만 강렬한 카메라 워크와 장치들도 매력적이었다. 그 작은 요소요소의 퀄리티들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런 좋은 작품임에도 내게 있어 '잠'은 어쩔 수 없이 이선균 배우 자체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됐다. 감정적으로 동화되기 쉬운 시점이라는 점을 배제하더라도 이 영화 속 이선균이 연기한 '현수'라는 캐릭터는 마치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짓 하나 대사 하나가 다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아마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크게 동요될 것 없는 장면들에서 고통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건 슬픔으로 어떤 건 분노로 또 어떤 건 원망으로, 영화 '잠' 속 이선균의 연기를 보는 건 몹시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어떤 존재는 곁에 있을 땐 미처 알지 못하지만 이별하고 나서야 더 많은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곤 하는데, 이선균 배우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차근차근 다양한 작품들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배우였기에 더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으로 이선균 배우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함에 이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