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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Nov 05. 2022

모카포트를 들고 다니는 뉴욕의 이방인

<그린카드> 속  조지의 커피를 회상하다.


뉴욕. 카페 아프리카 프랑스인 조지(제라르 드 파르디유)와 미국인 브론테(앤디 맥도웰)는 처음 난다. 지는 영주권을 받으려니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고 원예가인 브론테는 근사한 온실 정원이 딸린 아파트에 살고 싶다. 문제는 기혼자만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생판 모르는 조지와 브론테는 로커를 통해 위장 결혼을 기로 한다. 그리고 까스로 불법 부부가  날, 그들은 다시는 볼일이 없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헤어진다.



그런데 불법 체류자 단속에 나선 이민국에서 연락이 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지와 브론테는 인터뷰 앞두고 브론테의 아파트에서 진짜 부부처럼 얼마간 함께 살기로 한다. 니나 다를까 들은 사사껀껀 부딪힌다. 유분방한 조지는 까다로운 브론테가 갑갑할 뿐이고 섬세하고 신중한 브론테로썬 투박하고 거침없는 조지가 불쾌하기만 하다. 무리 위장결혼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을까. 





이민국 직원의 방문을 앞두고 커피 테이블 앞에 앉은 조지와 브론테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론테는 안절부절못하고 겉으론 담담한 척 하지만 긴장이 되는 건 조지도 매 한 가지. 그래서 그들은 커피를 마주하고 앉는다.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 보기에 고 익숙한 장면은 없으니깐.



조지- 이게 뭐예요?

브론테-디카페인 커피요.

조지-다른 커피는 없어요?

브론테- 없어요. 전 디카페인만 마셔요.

조지- 내가 진짜 제대로 된 커피를 만들어주죠. 한 번 맛보면 다른 커피는 못 마실 거예요.




프랑스를 떠나기 전 조지는 미국인들은 아주 맛없는 커피를 마신다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거다. 때는 아직 90년대였으니깐. 뉴욕 허드슨 강물을 절반은 쏟아부은 듯한 묽디 묽은 아메리카노도 조지는 예상했을 거다. 하지만 디카페인이라는 강적을 만날 줄이야. 장바구니에 선홍색 다짐육을 돌처럼 쌓 조 온갖 씨앗이 박힌 거무스름한 유기농 빵 주위를 기웃거리는 브론테 상반된 취향은 모카 포트와 디카페인 커피에서 정점을 찍는다.



실제로 이 둘은 자신들의 커피를 퍽이나 닮았다. 조지는 대충 닦은 알루미늄 포트 어딘가에 아 있을 커피의 흔적을 감내할 수 있으며 스레인지 불길을 타고 그윽하게 올라오는 가스 냄새불길이 조금만 세도 야속하게 녹아들어 가는 플라스틱 손잡이까지 모카포트가 제공하는 모든 즉흥적인 변수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는 섣부른 희망의 노예가 되기보단 현재슬픔에 충실한 사람이며 극단적으로 낙관적이기에 삶을 죄책감 없이 냉소할 수 있.



반면 브론테는 인생을 즐겁게 하는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하나 둘 제거한 상태에서 오히려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 커피는 마시지만 카페굳이 벗겨 내고 싶 햄버거는 먹지만 베지 패티가 더 양심적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이념에 둘러싸인 브론테에게 세상은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 그녀는 거대한 도시 꼭대기 온실 속에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지만 빈민가에 꽃을 심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이기도 하다. 떤 방식도 정답은 아니다. 둘은 그저 다를 뿐이고 그래서 다른 커피를 마실 뿐이다.





브론테의 디카페인 커피를 끝까지 마시길 포기하고 조지는 여행 가방에서 주섬주섬 모카포트와 커피봉지를 꺼낸다. 커다란 손으로 포트 상단과 하단을 분리해서 물을 채우고 커피 가루를 바스켓에 소복이 담아서 잠근다. 모카포트를 가스레인지 위에 안착시키고 성냥을 긁어서 불을 붙이기 직전의 조지의 표정에서 프랑스의 부엌에서 느긋한 아침을 준비하던 과거의 자신과 랑데부하기 직전의 설렘을 읽었다면 과장일까.



떠돌이 같은 행색으로 짐꾸러미 하나를 들고 브론테의 아파트에 나타난 그가 손수 커피 기계를 짊어지고 다니다니 아직 모카 포트란 것을 몰랐던 십 대의 나에게 이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커피 기계가 있다니 언젠 나도  귀여운 커피 포트를 들고 여행 가고 싶다고 꿈꾸 시절. 리고 간이 흘 유럽을 여행했을 땐 어느 호스텔에 가도 보일러 부분이 까맣게 탄 모카포크대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



여행가방을 꾸릴 때 우리는 쉼 없이 미래의 결핍을 예측하추리고 추린 일상을 거북이 등껍질럼 이고 길을 떠난다. 조지 가벼운 알루미늄 덩어리의 커피 기계가 만들어신의 '아' 포기할 수 없었을 거다. 조지의 모카포트 같은 존재를 우리 모두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에겐 첫 인도 여행 때 바라나시 시장에서 산 숄이 그렇다. 숙소 침대 정돈하고 양탄자처럼 펼쳐놓면 그곳이 어디든 내가 다시 돌아올 곳이 되었다. 아무리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인도의 향초 냄새가 첫 여행지에서 데려온 수호신이 되어 계속 나를 지켜다 생각했다. 오랜 옛날 아빠가 직장에서 방문판매원에게 거금을 주고 사들여서 엄마가 장비 빨을 세우는 아빠를 두고두고 놀릴 때다 소환되던 아이와 스피커도 나의 모든 여행에 동반자가 되어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들 슴 속의 달콤 쌉싸름한 기억들을 불러내 천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여행을 편집해주곤 했다. 





'제대로 된 커피'의 정의란 상대적이지만 난 조지의 표현을 대체로 이해한다. 푹푹 꺼지는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하는 모카포트 곁으로 허겁지겁 다가가서 보일러에 남은 물들이 다 빠져나오기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포트 뚜껑을 열 때의 두근거림. 분출하는 커피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작은 잔에 옮겨 담는 찰나의 정성. 아직 사라지지 않은 크레마를 간절히 붙들고 절반의 성공을 자축하는 순간. 두 모금 정도에 불과한  커피가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한 조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알 것 같다. 



뉴욕에 도착한 처음 얼마간 그는 건너 건너 지인들의 집을 전전했을지도 모른다. 돌아서면 기억하지도 못할 거면서 세상 궁금하다는 듯한 눈빛을 장착하고 예의상 던지는 호스트질문은 대답을 하고 또 하며 주인이 침구를 내어주고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순간 목 빠지게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불이 필요한 모카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부엌이 있는 곳이라면 헝겊이 감긴 야전 병원의 침대일지언정 그가 지친 몸을 누일 방도 있었을 거다. 아직 거처도 미래도 불분명하고 위장 결혼이라는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낯선 땅에 안착하고 싶었던 그에게 여행 가방 속에 자리 잡은 모카포트는 일종의 작은 안식이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선 조지가 끓인 커피를 마시는 장면 나오 않는다. 브론테는 자신의 디카페인 커피를 못 먹는 커피 취급한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부러 지의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모카포트가 커피를 다 만들어내는 순간 이민국 직원이 들이닥쳐 커피가 그대로 포트 속에서 식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간혹 모카포트로 커피를 만들 때마다 조지의 커피를 떠올린다. 그가 끓여낸 '제대로 된 커피'를 셔보고 싶다.



조지의 모카포트를 알고 나서도 한참 지난 후에야 난 암스테르담 여행 중에 4컵 모카포트를 샀다. 거리거리 암스테르담의 반지하 주택의 불 켜진 부엌 구석에 트가 보였고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엔 길거리로 삐져나오는 불빛에 이끌려 깨금발을 들면 부엌 선반 어김없이 크기가 다른 수대의 모카포트가 놓여 있었다. 밀라노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야 했던 날 이탈리아 친구는 아직 덜 깬 기색이 역력했지만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낡은 모카포트 관적으로 가스레인지 위로 가져갔다. 적절하 데운 우유를 섞 든 그날 새벽의 그 커피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암스테르담에서 모카포트를 샀던 해 내가 살았던 곳의 부엌은 사진가가 쓰던 암실 겸 아카이브여서 가스도 물도 쓸 수 없었다. 그때 함께 살던 하우스메이트들 복도에 놓인 인덕션에서 한 번 두 번 싸구려 커피를 추출해서 버리고 스테르담 카페에서 사 온  괜찮은 커피를 갈아 넣커피를 만들었다. 보 사용자를 만난 모카포트는 작은 주둥이로 온갖 불만을 토로하며 여기저기로 커피를 토해냈고 결과적으로 보일러에 남은 물이 추출된 커피보다 많았다. 그러니 각자에게 돌아간 커피는 고작 몇 스푼 정도였지만 우리는 제법 '제대로 된 커피'를 마셨다.



 집에서 4년을 넘게 살았지만 그곳은 내가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곳이었다. 곳에서의 생활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지만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  꿈꿨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브론테의 집에 초대받은 조지가 내심 너무 거웠을 것 같다. 응접실 뒤 펼쳐진 온실에서는 식물들이 자라고 넉넉한 바람이 불어오던 옥상이 있던 곳, 급조된 룸메이트인 브론테가 좀 까탈스럽긴 했지만 는 더 이상 자가 아니었다. 따뜻한 카우치에서 잠들 수 있었 고향에서 데려온 모카포트를 꺼내 쓸 수 었던 그 며칠 그는 정말 행복하지 않았을까. 리 한 구석에는 위장 결혼이란 것이 들통나고 영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겠지만 모처럼 마주안락함에 모든 걱정 유예하지 않았을까. 지는 이민국 직원과의 개별 면담에서 브론테가 쓰는  크림 브랜드를 실수로 잘못 말하는 바람에 결국 미국에서 추방된다.(50년을 함께 산 부부라고 해도 각자가 쓰는 크림 브랜드를 알아맞힐 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조지와 브론테는 결국 사랑에 빠진다. 브론테는 아마 조지를 만나러 프랑스에 갔을 거다. 브론테는 어쩌면 디카페인 커피 한 상자를 여행가방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부엌 선반에 놓인 모카포트들을 올려다본다.  모카포트의 플라스틱 손잡이는 진작에 불에 타 녹아버렸고 허공을 향한 비알레티 콧수염 아저씨의 손가락도 어느새 지워져서 흔적조차 없지만 여전히 내가 원할 때면 꽤 괜찮은 커피 한 잔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세상의 모든 조지를 떠올린다. 그곳이 어디든 그리고 누구와 함께이든 그들이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는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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