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5 ㅣ 아이러니한 나라 미국
미국에 도착한 첫날 Target이라는 마트에 샴푸며 치약이며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을 사러 갔었다. 학생들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대문짝 만하게 학생 인증을 하고 20% 쿠폰을 받으라고 적혀있었다. 뭐? 이 미친 물가의 나라에서 20%? 냉큼 학생증 인증을 하고 쿠폰을 손에 넣었다. 나중에 기숙사로 이사할 때에 이것저것 살게 많을 테니 그때 사용해야지! 그런데 웬걸 다음 날 지나가다가 음료수 한 병을 사 먹었는데 자동으로 20% 쿠폰이 적용돼서 홀랑 날아가버렸다. $100도 할인받을 수 있었을 쿠폰을 달랑 $1에 날려버렸으니 억울하다!! 사용법을 자세히 읽어보니 내가 앱에서 'apply' 버튼을 눌러놓아서 바로 다음 계산에 적용이 된 모양이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우니 자꾸 떠나간 내 20% 쿠폰이 아른거려 고객센터에 연락을 해봤다.
상담원이 연결돼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하는 말이 'Hey~ 너 너무 속상했겠다! 몰랐으니까 네 잘못 아니야. 그래도 다음번에는 apply 버튼을 꼭 해제해 놓도록 해. 근데 이미 적용된 쿠폰은 취소 못해.'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고객님, 이미 사용처리 되었으면 취소가 불가합니다. 도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했을 듯한데 어차피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해줄 거 면서 뭐가 저렇게 영혼 있게 공감을 해주고 난리야라고 생각하던 찰나,
'취소는 못하지만 너 속상할 테니까 내가 30% 쿠폰을 새로 줄게!'
네...? 왜... 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나랑 일면식도 없는 Harvey는 다음번에 할인받고 싶을 때 주문하고 나서 주문번호를 알려주면 30% 금액을 환불해 주는 식으로 쿠폰을 대신해 주겠다고 했다. 상담센터 직원의 재량으로 이런 조치가 가능하다니! 사실 시간이 많아서 문의나 한 번 해보자였지 대단한 조치를 기대한 건 없었다. 혹시나 할인 금액을 취소하고 쿠폰을 되살릴 수 있으려나? 정도의 기대였다. 안된다고 해도 뭐 내가 사용방법을 잘 숙지하지 않은 거니 탓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데 Target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같은 조치를 받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끈질긴 진상을 부리던 끝에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정도는 보여줬어야 나왔을 카드가 아닐까?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이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담센터 직원의 재량으로 이런 조치가 가능하다니, 더군다나 그 직원이 가장 먼저 떠올린 대책이 '속상할 테니 더 좋은 쿠폰을 주자!'라니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로 즉각적인 대응이 나온 걸 보면 아마도 이미 이런 조치가 매뉴얼화되어있었을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상당히 감성적인 마케팅이다. 나만큼 끈질기게 문의하는 고객도 많지 않을 테고 그 고객은 아주 만족하고 다음 주문을 꼭 할 테고! 나만해도 지금 Target한테 좀 반했으니까!
Harvey는 그렇게 '그나저나 너 이름이 참 예쁘다!'는 마지막 감성케어까지 잊지 않고 남긴 뒤 떠나갔다. 원래 미국인들은 안부인사처럼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안경이라던가, 신발이라던가)를 칭찬하곤 하는데 눈에 안 보이는 전화 상담이니 이름마저 칭찬해 주는 케어에 혀를 내둘렀다. 이것도 매뉴얼에 있었을까? 이 에피소드는 꽤 인상적이라 상세하게 기억하지만 이것 외에도 미국은 참 의외로 감성에 호소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들이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뭐 학교에서 출석일을 못 채워도 안타까운 사정을 설명하면 리포트를 제출한다던지 하는 새로운 옵션을 준다던지, 관공서에서 구비서류가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노인이라 온라인 시스템에 취약하다고 하면 또 그냥 봐준다던지 띠용? 하는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미국에서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면 섣불리 포기하지 말고 구구절절 사연을 풀어놓는 감성자극 전략을 펼쳐 보자는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해 보면 미국은 참 내 예상을 벗어나는 나라다.
제목으로 어그로를 좀 끌었는데, 제일 웃긴 건 길에서 대마초는 펴도 되지만 술은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다. 미국의 여러 주들은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아예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음주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심지어 술을 사기도 힘들다. 작은 마트에서는 아예 팔지도 않고 Target 같은 큰 마트에서는 직원을 불러서 꺼내야 하고 liquor샵에 가면 무섭게 생긴 직원에게 가방까지 빼앗긴 채 살금살금 한 병 집어와야 한다. 사는 게 번거로워서 그런지 술을 잘 먹지도 않게 된다. 간혹 공원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는데 갈색 종이봉투에 병을 꽁꽁 숨겨 마신다. 방 창문을 열고 있으면 대마초 태우는 냄새가 솔솔 흘러들어오고 길가에는 벽 보고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참 웃기는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