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싶은 말(The Last Word)
완벽한 인생은 없다.
자기의 선택대로 살고 그 선택엔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담긴 것이니.
'해리엇'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사망했을 때의 사망 기사가 어떻게 남겨지게 될지 고민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나름 만족스러운(?) 사망기사를 만들기 위하여 사망기사 전문기자인 '앤'을 고용한다.
해리엇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사람들의 여러 사망기사를 보며 자신의 인생에 부족했던 무엇을 느낀다. 사망기사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들ㅡ주변 사람들의 애정과 인정, 타인에게 주는 '선한' 영향력ㅡ은 그녀 인생에서는 부족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선택해서 꾸려나갔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떠하였는지, 마주한다.
해리엇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가진 능력을 펼치며 살아가고자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여자는 일보단 가정을, 강함보다는 순종과 인화를, 자신의 주관대로 목소리를 내기보단 대세를 따라가야 한다는 통념과 시스템에 도전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뚫고나가며 살았다.
그런 그녀는 죽기 전까지 다시 도전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 DJ를 도전하고,(심지어 그것까지 잘해낸다.) 자신에게 부족하다 싶었던 '타인에게 베푸는 선한 영향력과 사랑'을 위한 덕목을 위하여 환경이 어려운 아이를 선택해 돌본다. 물론 그녀는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아이에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지원해준 것은 오히려 더 실질적인 사랑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망기사만을 쓰는 앤에게 현실을 변명삼지 말고 본인이 정말로 하고 싶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써보이면서 살라며 '호통을 친다'. 그리고 앤은 그녀의 호통에 처음에는 고통스러워했으나 자신답게 살기 위한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을 돌아다본다. 여기서 재밌었던 점은 해리엇이 자신의 일에 몰입하느라 상대적으로실패했다고 여긴, 가족(자식)에 대한 죄책감을 오히려 덜어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통쾌했던 점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괴팍하리만치 고집이 센 사람이자 희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는 여성은 '당연히' 가정에 소홀하고 가족, 자식들이 그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란 통념과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다른 가정의 부모보단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고, 따뜻한 애정을 더 많이 주진 못했으며 그녀의 강박과 예민함을 딸에게 물려(?)준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자녀는 사회적으로도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이고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잇었으며 행복한 가정까지 꾸리며 살았다. 분명 그녀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지켜보며 그녀의 딸 또한 좋은 영향을 받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예민한 성격을 대하는 태도가 그녀완 달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망기사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어느 과거의 시점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회환을 느꼈을 것이다. 조금 더 그때의 예민함을 내려놓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주고받으며 살 것을, 조금만 나의 고집을 꺾어 사람들과 조화로이 문제를 해결해볼 것을.. 하는 후회들.
그런 후회들을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인정하고 자신을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진심으로 과거에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가 후회만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답게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녀의 신념하에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자신의 능력을 할 수 있는 한 펼쳐보이며 살았다.
그녀의 인생과 마지막 시간들이, 그녀의 유언과 사망기사 그 자체였다.
나는 어떤 삶을 살것인가. 죽음을 앞두었다고 생각하면 가끔 정신이 번쩍 떠진다. 어떤 선택을 하든 아쉬움은 남겠지만, 죽음을 앞두었을 때 후회하는 것 보다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 것에 따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열정적으로 살았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