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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May 14. 2023

행복할 수(있었으나) 없었던, 남자

넷플릭스 영화 행복한 남자 (A fortunate man)

행복은 주관적이다.

그가 원하던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그, 페테르에게는 그의 발명품(풍력발전 등 자연친화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프로젝트)을 현실화시키는 것, 그것이 그의 행복처럼 보였다. 페테르의 프로젝트는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퍼부었던 결과물 그 자체였으며, 그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돈, 상류사회의 연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시스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여러가지 운과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해가는 듯 했다.

(그는 고집쟁이의 가난한 공학도로,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은 천재적인 능력뿐인 듯 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얻어가는 데에도 자신의 매력과 끈기로 쟁취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그러나, 그의 연구물이자 어쩌면 그의 세계 자체인 프로젝트가 현실화되는 것을 목전에 두고 그는 자신의 고집과 자존심을 꺾지 못하여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버린다.

영화를 보면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잠시만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면, 자신이 구상한 것을 이루어 인정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을텐데.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억압적인 목사 집안에서 자라며 그의 뜻, 비전, 능력을 철저히 외면당했던 과거 시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뜻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통제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자신 본질을 흔들리는 것과 같이 여기며 절대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게 된 것이다.

사실은 조금은 융통성있게 자신의 뜻과 상대의 뜻을 융화시키며 목표를 이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오롯히 그의 연구 결과인 그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의 지휘 아래에서 실현해나가야하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다 느낀다. 누군가의 지휘와 통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흐리게 만들 정도의 위협으로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본인도 이 프로젝트가 자본과 연줄이 없으면 이루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알았듯이 그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다른 이의 개입이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롯히 혼자서만 이루어내는 일은 거의 없으며, 가끔 갈등이 생기더라도 이를 풀어나가며 어느 정도 유연히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 그리고 다른 이들과 그렇게 함께 갈등을 풀어나간 경험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없었기에, 그런 것을 여유롭게 풀어나가지 못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고집대로만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고집이 이해가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시대적인 배경에서도 더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인 1880년대에는 신과 종교의 영역과 그가 다루는 기술(공학)의 영역은 어떤 관점에서는 전혀 접점이 없는 대치된 관계였다. 맹목적으로 신을 믿는 목사 아버지와 그 가족들, 그리고 기술의 원리를 믿고있는 페테르는 서로의 추구하는 바를 같이 다뤄본 적 없고 어쩌면 각자의 지향점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을 시절이었다. 그리고 페테르는 그러한 시절 속에서 특히나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해결해보고 관계를 발전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자주인공 야코베의 말처럼 사실은 신과 기술 모두 결국은 사람을 향하지 않는가. 모두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목적으로 서로의 자리에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기술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생활과 삶 속에서 기회를 주며 개선시켜나간다면 사실은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던 때가 아니었다.


결국은 자신 프로젝트의 실패가 정말 자신의 인생 자체의 실패로, 자신의 부모님과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 처럼 모든 것을 등뒤로 하고 시골로 돌아간 모습은 너무나 씁쓸했다. 시골에서도 자신의 뜻을 버리지는 못하면서도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살아가지도 못하는, 외로운 그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부드럽고 순종적인 여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엄하고 고집센 아버지인 페테르의 모습은 본인이 혐오하던 본인의 아버지의 모습과 똑닮아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와의 이별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찾고 사랑을 널리 퍼뜨리는 삶을 살아간 야코베의 삶은 빛났다.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 나쁜 남자였지만 그를 알고 사랑하며, 이별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성장했다.

그를 알고 사랑하며 이별함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포용받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시선을 갖게 되었으며(그를 만나기 전에는 책 속에서나 알고 있었을 어려움이나, 그런 이들의 어려움을 보다 생생히 접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풍족함과 경제력을 어린 아이들의 가능성을 키우고 알아봐주는 공간을 키우는 것으로 쓰게 되었으며,(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그녀에게 '당연히' 주어진 풍족함을 '우아하게' 즐기며 자신이 결혼해서 부양하게 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만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상류층 여자들 중에서도 원래 남달랐다. 그녀의 다른 여자 형제들과 달리 세상사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지적인 사람이자, 신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일이라며 개방되고 성숙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이들을 품고자 하는 포용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남으로써 그녀의 세계가 넓어지고, 삶의 지향점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에 페테르가 그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야코베와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과연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그와 이별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 아닐까. 만약 둘이 함께였다면 그가 현실화시키는 에너지사업을 지켜보며 그녀의 경제력과 포용력으로 그를 응원하고 지원해줬을테지만, 지금처럼 그녀 자신의 사업을 키울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어릴 때부터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가족과 주어진 가정환경은 사람들의 삶과 미래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나의 능력, 관심, 재능이 나의 타고난 가정환경과 부딪힐 경우에는 더 어려워지겠지. 그 속에서 내면의 갈등과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가끔은 답을 알 수 없고 혼란스러워 나의 가족들,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 이끌려가기도 쉽다. 그러나, 내가 어떨 때 행복하고 내가 무엇을 지향하고 싶은지는 나만이 알 수 있고 나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최소한 그처럼 나의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의 지향점 그 바깥으로 도망가고 싶지는 않다. 그가 시골로 돌아가 가정을 꾸렸을때, 거기에서도 자기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이루지도 못하고 미련처럼 붙들고만 있을 때 그의 그 쓸쓸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 때 너무나 불행해보였다.

여주인공 야코베처럼 너무나 뼈아픈 상황이 생기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싶다. 물론 야코베는 타고난 환경이 더 풍족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더 큰 사랑으로 베풀며 살아가는 것은 오롯히 그녀의 선택으로 일구어낸 결과였다.  

내가 어떤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가진 객관적인 환경(경제적인 부분과 타고난 것들)과 주관적인 관심과 재능을 어떻게 발현시키며 살 것인지 고민하고 부딪히며 살고싶다.

항상 즐겁고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렇게는 시도해보아야 나중에 많은 시간이 흘러 미련만을 붙들고 씁쓸한 표정으로 살지는 않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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