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아" - 라스 폰 트리에
0. 현실적이며 판타지같은, 재난 상황.
사실은 최근의 내가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을 겪었기에이 영화가 끌렸던 것 같다. 억지로 밝은 영화를 보고싶진 않았다. 영화에서는 우울함과 불안함의 감정이 두 인물들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져 그 감정의 한가운데에서 같이 방황하게 만든다. 지금 그 감정들을 겪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겪었을, 인간에게 가까운 감정들이다. 역시 인간의 감정을 헤집어내어 불편하게 만드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영화 다웠다.
재밌는 점은 그 감정들을 겪는 인물들의 상황이 너무나 현실적이었다가 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듯 펼쳐져,결론적으로 더 현실과 같았다는 점이다. 간혹 너무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면, 그것이 내 온몸을 흔들듯 가까이에 있는 듯한데 그러한 상태는 보통 일상의 내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여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때론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에 재난처럼 닥쳐와 공포감마저 느끼고 무력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처절하게 현실적이나 또 동시에 우주 판타지이자 재난영화다. (실제로 멜랑꼴리아 라는 행성이 지구를 충돌하는 우주 판타지이자 재난 영화다.)
1. 저스틴, 우울함.
저스틴은 우울함에 빠져 무기력함과 싸운다. 성대한 결혼식을 하는 중이며 얼핏 보면 그녀는 행복해 보이기도 하나, 실은 그녀는 잿빛의 실타래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어 걷기도 힘든 상태를 느끼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괜찮은 척 해야하는 현실의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러간다. 결혼식의 식순은 너무나 많고 느리게 흘러가며(정말 저 젠장할 결혼식이 빨리 제발 끝나길 같이 빌게 되었다), 그 속에서 억지로 웃으며 버텨내는 그녀의 감정이 버거웠다. 느리고 장엄하게 흘러가는 클래식 음악까지도 나를 압도하며 버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까운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우울한 상태에 무관심하며, 당연히 그녀가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이니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렵다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모두가 다 두렵고 힘들다"며 마치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위태로움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사회적인 체면만 생각하거나 혹은 행복한 미래를 이야기하면 나아질 것이라고안일하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출중한 능력, 아름다운 외모, 곁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우울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그 우울함과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보려 결혼식도 성대하게 치르고자 했지만 결국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한 척 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그렇게 해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하며 더 무너지고 만다.
우울한 상태의 그녀는 자주 하늘과 별을 바라봤었다. 자신의 내부 세계가 힘겨웠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행성이 지구에 충돌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마주하자 그녀는 오히려 평온해진다. 자신의 세계가 이미 안에서 죽은 상태이기에 세상의 종말이 오히려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2. 클레어, 불안함.
그녀의 평온한 일상은 '멜랑꼴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에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속에서 불안함에 휩싸인다. 영화에서 과학자인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결국은 그녀를 제일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며 하나도 불안해보이지 않기에, 더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 결국은 그 불안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비겁하게 혼자 도망간다. 불안을 함께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불안해할 때 왜 불안한지 들어보고 그 불안함을 어느 정도 이해해보려 하며, 같이 견뎌내보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점점 다가오는 행성의 소리와 그에 따른 클레어의 불안처럼 나도 옥죄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생각해보자면 불안이라는 것은 확실한 답이 없는 상황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더 커지게 된다. 영화 속 행성의 지구에의 충돌 여부처럼. 행성의 지구 충돌 여부는 과학자들이 연구해 도출된 "확률"과, 어떤 연구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가끔 발생하는"우연" 사이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 자체로 불안의 상황이다. 그 불안의 상황은 확률과 우연 사이에서 떠돌며 확실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고통의 문제가 된다. 현재 시점에서는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확률로 점치거나 우연의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항상 행성의 충돌과 같은 어떤 불안의 상황 속에서 방황하며 산다.
3. 인간의 종말, 우울함과 불안의 종말.
불안의 근원인 행성(멜랑꼴리아)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장면은 파괴적이지만 그 또한 아름답다. 영화속 세상은 일단 끝이 났다.
가끔은 내 삶에 일부 차지하고 있던 어떤 세계, 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끝이 날 때가 있다. 내 내부의 세계일 때도 있고 외부의 상황이기도 하다. 보통은 그 두개가 섞여있지만. 그 세계들 속에서 사람들은 확률과 우연 속에서 방황하다가, 때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로 파괴하거나, 혹은 우연히 파괴된다. 파괴시키거나 파괴당하기 전은 불안 속에서 고통스럽기도 하다. 파괴시키는 입장에서도 이게 옳은지 확률을 생각하느라 힘들며 파괴당한 사람들은 그 충격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저스틴의 말처럼, 파괴들은 가끔은 악의없이 벌어지고 자연스러운 일들이기도 하다. 그저 일어난 일. 나에게 닥쳐온 재난이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일. 그리고 결국은 무언가가 완전히 종말해야 어떤 형태로든 새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게 된다.
*공감갔던 다른 누군가의 네이버 후기 : 우울의 자매는 불안이며, 아버지는 무관심이고 어머니는 냉소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