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연일 하늘은 청명하다. 애틀랜타에 도착한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은근히 쌀쌀했다. 한국보다 따듯하다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생각했는데, 비가 개이고 해가 나니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서 11월인데도 한국의 늦여름이나 초가을처럼 따사로웠다. 하지만 조지아텍 iStart 홈페이지의 로그인 오류로 인해 체크인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 바람에 이 좋은 가을 날씨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열흘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사방 수소문을 하고 이메일을 보내고,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기를 반복한 끝에 오늘 오전에서야 간신히 온라인 체크인 서류를 업로드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서류를 업로드했을 뿐 승인이 된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이후 진행은 별 탈 없이 이루어질지 어떨지 여전히 알 수는 없으나 일단 한 단계 진행된 것만으로도 크게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체크인 신청을 완료했다는 성취감에 오늘 하루만큼은 정착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여행을 온 마음으로 미국에서의 하루를 즐겨보기로 했다.
체크인 신청을 하느라 이미 오전 나절을 다 허비한 터라 멀리 나설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애틀랜타에서 북쪽으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헬렌 조지아라는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미국에서 유럽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길을 나섰는데, 미국에 와서 미국다운 풍경도 제대로 보지 못한 마당에 유럽의 풍경을 보러 떠나는 것이 어딘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지만 도시를 구경하기에 오늘은 하늘이 너무 파랬다. 이런 날은 근교로 나가야 한다.
헬렌 조지아에 도착하기까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미국적이었다. 쭉 뻗은 도로와 양쪽으로 늘어선 키 큰 나무들과 너른 들판,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거대한 성조기들과 그 아래로 늘어선 수 십 대의 트럭들. 그러다가 헬렌 조지아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건물들이 나타났다. 뾰죽하게 솟아 있는 빨간색 지붕들이 무척이나 이국적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유럽의 여러 관광지를 조금씩 떼어 붙여 만들어 놓은 듯한 느낌의 마을이었다.
§ 처음 마을에 들어섰을 때 독일어로 된 간판이 보여서 독일을 모델로 한 곳인가 싶었다. 그런데 둘러보니 어느 곳은 네덜란드 풍차가 있고, 또 다른 곳에는 스위스 상점이 있었다. 위의 하이델베르크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은 식당인데 이름만 보면 독일 음식점 일 것 같지만, 슈니첼과 부어스트 외에도 굴라쉬와 코르동 블뢰도 팔고 있었다. 음식 역시 여기저기서 조금씩 떼어온 모양이다.
이렇게 여러 나라의 풍경들을 뒤섞어 놓은 이유가 유럽풍이라고 생각하는 풍경을 모아놓고 싶어서 인지, 아니면 각 나라의 특징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한국인이 유럽여행을 선호하는 이유가 일종의 동경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알려진 미국인들도 작은 유럽 마을을 만들어 놓고 구경하는 것을 보면 그저 낯선 풍경에 마음을 사로잡히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를 다 떠나서 그냥 예뻐서 일 수도 있다.
§ 나는 우리나라만 캐슬 같은 이름을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여관 이름에 붙인 캐슬과 아파트 이름에 붙인 캐슬 중 어느 것이 더 미스매치 한 지는 모르겠다. 물론 가장 미스매치한 것은 캐슬에 산다고 자기가 진짜 왕인 줄 아는 진상 대마왕 입주민 또는 투숙객이겠지만.
흔히들 아름다움의 기준은 주관적이라고 말하지만, 모두가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예술작품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분명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그 보편적인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인지, 색다른 풍경이 호기심을 자극해서인지 잘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나라의 환경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풍경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예쁘다고 느낀다면 단순히 건물이 예뻐서라기 보다 그 안에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헬렌 조지아는 유럽의 콜라주 같은 작은 마을이어서 유럽의 역사나 문화까지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풍경에 정착과정에서 쌓였던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내기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