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날. 동지가 다가오니 해가 한결 짧아졌다. 날씨는 여전히 가을 같아도 겨울은 겨울임을 실감한다. 노을을 보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해 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 동절기의 장점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애틀랜타에서 일몰 보기 좋은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일몰 포인트야 한 두 곳이 아니겠지만 너무 멀리 가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톤 마운틴을 가기로 했다. 미국의 지명을 보면서 참으로 직관적인 작명법이라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스톤 마운틴 역시 그렇다. 한국말로 하면 '돌산'. 세계 최대의 단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고 하는데 크기는 하지만 99%는 땅 속에 있어서 드러난 곳 만으로는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지는 않는다.
스톤 마운틴은 스카이라이드(케이블카)를 타면 4분 만에 오를 수 있고, 도보로는 1마일 정도라 3~4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우리는 팸플릿에 나와 있는 도보 30분이라는 안내가 우리나라 부동산 광고의 역에서 5분 거리 - 실제로는 20분인 - 같은 과장된 내용이 아니기를 바라며 걸어 올라가는 쪽을 택했는데, 다행히 시간을 측정한 사람이 나 정도의 체력이었는지 출발 후 정직하게 30분 정도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 케이블카 타는 곳과 도보로 오르는 곳은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는데, 도보로 오르면 산 측면에 새겨진 유명한 조각을 볼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케이블카 타는 곳에 들러서 조각을 보고 산을 오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진에는 잘 안 보이지만 제퍼슨 데이비드 남부 대통령, 로버트 리 남부 사령관, 스톤월 잭슨 장군이 새겨져 있다. 한편 이곳은 KKK가 주로 집회를 열고 활동했던 본거지라 인종차별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때문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I have a dream>으로 알려진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조지아의 스톤 마운틴에 자유의 종이 울리게 하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산을 오르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길이 온통 돌덩이로 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수월하지는 않다. 간간히 나무가 있기는 한데 듬성듬성해서 여름에 오르면 제법 덥고 힘들 것 같다. 한편 돌로 된 길바닥에는 군데군데 새겨진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 김영하 작가는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변하기에 불변하는 것에 이름을 새기려 한다고 했는데, 이 산에는 유독 마음 약한 사람들이 많이 왔던 건지 단단한 화강암에 어떻게 새겼나 싶게 많은 흔적들이 무수히 남아 있다. 산 정상은 탁 트인 널찍한 곳이어서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들 편한 곳에 앉거나 누워 땀을 식히고 있었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 계산을 잘못했는지 해가 지려면 30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 무한대의 사랑을 꿈꾸던 매리앤과 그렉은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까? 혹 헤어졌다면 다시는 이곳은 찾지 못할 것 같다. 그러게 사랑을 쓸 때는 연필로 썼어야지. 산 정상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수풀 너머로 애틀랜타 시내가 아득하게 보인다. 울창한 삼림과 삐죽이 솟은 빌딩의 모습이 지나치게 대조적이라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동화에 나오는 신비의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늘이 영 심상치가 않다. 오늘은 낮부터 좀 구름이 많다 싶었는데 저녁때까지도 짙게 내려앉아 태양을 가리고 있다. 남편은 오늘은 아무래도 일몰을 보지 못 할 것 같다며 그만 내려가자고 말했다. 땀이 식으니 약간 쌀쌀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기다리고 싶었다
구름이 언제 걷힐지는 아무도 몰라
말은 이렇게 했어도 정말 걷힐까 반신반의했는데 신기하게도 일몰 시간이 다가오면서 구름이 점점 사라져 갔다. 물론 영화처럼 한 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서서히. 태양은 마지막까지 이글거리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다가 축복처럼 아름다운 하루의 작별인사를 남기고 지평선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언젠가 재밌게 본 넷플릭스의 2차 대전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날씨 때문에 우연히 승패가 갈린 전투가 많았다고 하는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에 짜잔 하고 전투기가 등장해 주인공을 구했던 그 전투 역시 극적인 연출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지역에 며칠 동안이나 구름이 짙어 공군이 지원을 못하다가 갑자기 날이 갠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 같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도 날씨 같은 외부적 요소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보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도 자연히 겸손해진다. 내 인생의 구름이 언제 걷힐지 또는 화창했던 인생이 언제 다시 구름으로 덮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어떠한 굴곡을 만나든 크게 좌절하지도 지나치게 우쭐대지도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는 날이다. 물론 우쭐댈 만큼 찬란한 인생의 정점에 서 보지도 못했지만 구름이 약간 있는 잔잔한 날이 어쩌면 제일 예쁜 것 같아 괜찮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구름 섞인 고만고만하게 예쁜 하루를 마친다.
§ 오늘은 산에만 올랐지만 스톤 마운틴 공원 내에는 호수와 트레킹 코스 등이 다양하게 있어서 바람 쐬러 오기 좋은 곳 같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아서 나중에 짐이 오면 자전거를 타러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에는 조각이 있는 곳에서 레이저 쇼를 한다는 데 이 역시 볼만 하다고 한다. 공원은 입장료가 없는 대신 주차요금이 하루 20달러인데 연간 주차권은 40달러라 다시 올 생각에 연간 주차권을 구입했다. 많이 멀지 않으니 다른 계절에 또 찾아와 자전거를 타든 호수에서 카약을 타든 캠핑을 하든 다르게 즐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