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 적에는 밤이 되면 학교에 있는 동상 - 책 읽는 소녀 같은 - 이 살아 움직인다는 괴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악마의 인형 처키 정도의 비주얼이라면 모를까 얌전히 앉아서 책 읽는 소녀가 움직이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우리 모두 겁이 나서 낮에도 동상 근처는 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우리만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급기야 숀 레비 감독은 밤이 되면 유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을 영화로 만들었다. 오늘 우리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인 미국 자연사박물관을 찾아갔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전시품들을 보니 왜 그런 영화가 나왔는지 알겠다. 유물 위주로 전시된 한국의 박물관들과 달리 이곳은 박제나 등신대 마네킹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 많은데, 전시품들이 어찌나 사실적인지 이들이 살아 움직이는 상상을 하고도 남음직 했다. 한국이라면 박물관이 살아있다 한들 밤마다 고려청자가 날아다니는 정도일 텐데 뭐가 무섭겠는가. 음, 머리 없는 불상이 걸어 다니면 좀 섬뜩할 것 같기도 하다마는.
§ 너무 사실적이라 그림처럼 보이는 코뿔소들과 거대한 공룡들. 이 외에도 당장에라도 유리 밖으로 성큼 걸어 나올 듯한 사실적인 전시품들이 굉장히 많다. 이 나이에도 부끄럽게 공룡을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며 공룡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물론 이 녀석들이 살아 움직인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박물관의 수집품들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데 생활사나 동물은 물론 광물, 고생물, 운석 등 한국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것들도 볼 수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생활사는 북미, 중미, 남미의 유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식민지였던 필리핀이나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가 활동했던 파푸아 뉴기니 지역 유물들도 상당히 갖추고 있었다. 한편 동양의 유물은 비교적 적었는데 그나마 유럽과 가까운 근동이나 중동 지역, 그리고 미국의 최우방인 일본의 유물은 제법 되었지만 극동인 한국은 한 코너도 안 되고 유리 부스 하나에 조선시대 집 안의 풍경을 재현해 놓은 것이 전부라 조금 씁쓸했다. 한편, 엄격한 분위기의 한국 박물관들과 달리 이곳은 사진 촬영도 자유롭고 반려동물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다만 사람이 많은 데다 관람객의 모습이 유리 부스에 반사되어 편광필터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사진 촬영이 쉽지는 않다. 전시품 중에는 네안데르탈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 교과서에서 보았던 인류의 조상들의 두개골도 있어 아주 흥미로왔는데 왠지 섬뜩해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 (위) 정면인 줄 알고 찍었는데 알고 보니 뒤편이었던 박물관 건물 전경. (가운데) 보자마자 "달력이다!"하고 뛰어갔는데 아래를 보니 달력이라고 잘못 알려진 태양석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모든 것을 책으로만 배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 유물. (나머지) 각각 중남미, 파푸아 뉴기니, 발리의 유물. 파푸아 뉴기니 가면은 마가렛 미드의 기증품이다. 유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전혀 교류가 없는 지역의 유물들이 묘하게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인간의 예술적 본능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 모두가 묘하게 닮아 있으면서도 아름답다.
한편 박물관에서는 개관 150년을 기념하여 30분짜리 간단한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바다사자에 대한 영화와 우주에 대한 영화 중 하나를 선택해서 관람할 수 있는데 나는 우주에 대한 영화 <Worlds Beyond Earth>를 골랐다. 영화는 천정이 거대한 돔으로 이루어진 플라네타리움에서 상영하는데 크기에서 일단 압도되는 데다 스크린이 둥근 천정에 있어서 실제로 머리 위에 별들이 떠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레이터는 영화 <노예 12년>으로 유명한 배우 루피타 뇽이 맡았는데 목소리도 발음도 너무 좋아서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영상은 태양계의 각 행성과 지구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내용이라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서 지친 다리를 쉴 수 있다는점이 가장 좋았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아주 재미있게 읽은 후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져 <Worlds Beyond Earth>를 선택했는데 박물관 관람 이상으로 좋았다. 비밀이 많을수록 더 많이 알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인 걸까. 우주에는 여전히 감춰진 사실들이 많다. 마치 달의 뒤편처럼. 나는 그 뒤를 보고 싶다.
나이가 들면 호기심과 감동을 잃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니 유물들이 아니라 죽어가던 나의 호기심이 되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큰둥하게 살기에는 여전히 세상에는 신비로운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다. 더 많이 감동하고 살아야겠다. 죽은 빵도 살린다는 그 유명한 <더 토스터>처럼 자연사박물관은 바짝 말라가던 내 호기심과 감동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생기를 가득 불어넣어 주었다.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나는 이곳의 어린이들이 너무나 부러워졌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다양한 문물을 접한다면 세상에는 정말 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될 텐데.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납득이 간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이니 어린이들은 모두 뉴욕으로 보내야 하려나 보다.
§ 고프로로 찍고 편집한 박물관 내부 영상. 촬영본이 허접하니 고프로에서 제공하는 현란한 편집기술도 다 소용이 없구나. 뭐든지 원재료가 제일 중요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