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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숨결이 내려앉은 서가 사이에서

뉴욕공공도서관

by 더스크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서관을 싫어한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당연하기도 하지만 학구열의 여부를 떠나 도서관의 경직된 분위기를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 모든 도서관들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묘하게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듯 한 느낌이 드는데, 이를 답답하다고 여겨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꺼리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반대로 도서관의 그 묵직한 공기가 좋다. 이곳의 공기가 무거워진 건 선인들의 지혜가 녹아든 탓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가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가벼운 압박감에 안도하듯, 도서관이나 서점의 서가 사이에 파묻혀 나를 누르는 그 공기의 밀도를 즐긴다. 적막한 평화로움의 이면에서는 저자와의 치열한 지적 대화가 펼쳐지는, 한없이 홀로이면서 역설적으로 전혀 외롭지 않은 아이러니로 가득한 공간.


나는 이 익숙한 묵직함이 그리워 뉴욕공공도서관을 찾았다. 뉴욕공공도서관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고풍스러운 외관에 엄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건물 구석구석에 오랜 숨결들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짧은 일정으로 방문한 여행객에게는 이를 만끽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 수박 겉핥기 식으로 건물만 구경하기에도 벅찼다. 옛 문인들의 흔적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일정이 못내 아쉬워 다음에 또다시 찾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때는 짬을 내어 열람실에서 짧은 에세이 한 편이라도 읽으면서 도서관의 묵직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다. 한편 뉴욕공공도서관에서는 개관 125주년을 기념해 <Treasures>라는 제목으로 도서관 소장 귀중본 전시를 무료로 진행하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을 비롯해 마르크스나 볼테르 등 사상가들과 대문호들의 친필 원고, 콜럼버스의 편지 등 다양한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책이나 기록물 외에도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친필 악보, 찰스 디킨스의 책상, 버지니아 울프가 사용하던 지팡이 등 저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컬렉션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볼거리가 더 풍부했다.


§ 뉴욕공공도서관 125주년 기념 보물전 입구와 도서관 내부. 건물 밖에는 뉴욕공공도서관의 상징인 사자가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목에 장식을 걸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한편 도서관 바로 옆 브라이언트 공원에서는 마침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행사를 해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 사람들 중 반이라도 도서관에 들러 주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잠시 품었다.


글을 마치기 전 고백하자면 뉴욕 공공도서관을 가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기프트 샵 때문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뉴욕공공도서관 기념품 중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새겨진 은팔찌를 본 이후 꼭 이곳에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기대를 품고 찾아간 도서관 기프트 샵에서는 예상대로 책 덕후라면 정신을 못 차릴 근사한 굿즈를 많이 팔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일 마음에 든 북 카드 디자인의 토트백은 품절인 데다 재입고 예정도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책 한 권과 에코백, 그리고 옛 동료들에게 보낼 작은 선물들만 구입했다.


§ 나를 반하게 한 문제의 팔찌.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16번이 새겨져 있다. 전문은 아래 참고. 이 팔찌는 여전히 판매 중이긴 한데 뱅글이라 잘 안 착용하게 될 것 같아 고민 끝에 구입하지는 않았다. 예쁜데 실용성 떨어지는 물건은 나를 정말 슬프게 한다.


Let me not to the marriage of true minds
Admit impediments. Love is not love
Which alters when it alteration finds,
Or bends with the remover to remove.
O no! it is an ever-fixed mark
That looks on tempests and is never shaken;
It is the star to every wand'ring bark,
Whose worth's unknown, although his height be taken.
Love's not Time's fool,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d,
I never writ, nor no man ever lov'd.




셰익스피어 소네트 116번은 "사랑하는 두 마음의 결합에 장애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번역가에 따라 "진실한 두 영혼의 결합을 방해하지 말지니"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어떤 시련도 극복하는 사랑의 강인함을 담고 있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사물이 대상인 경우에도 일단 좋아하게 되면 걸림돌이 있어도 어떻게든 넘어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책이나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아마도 주위의 편견일 것이다. 너드에 재미없는 진지충이라는 편견. 바로 나처럼.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책에 대한 사랑도 동일하게 고귀하니 부디 우리의 결합을 방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밖에서는 정체를 숨기고 열심히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편견을 극복하려 애쓰는 우리를 부디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우리는 따분하기는 해도 해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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