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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리게 걷기로 했다

뉴욕, 혹은 그곳이 어디든

by 더스크

모든 것이 풍요로운 뉴욕은 소음도 차고 넘쳐 아침부터 사방에서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남편의 연구실 교수님이 자칫하다간 총 맞는 수가 있으니 운전 중에 절대 경적을 울리지 말라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이곳에선 시도 때도 없이 경적소리가 들린다. 교수님 말대로라면 뉴욕 인구의 절반은 이미 황천길에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을 터였다. 여하튼 뉴욕의 아침 거리는 도시를 메우는 소음들 사이로 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베이글을 들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뉴욕 시민이라면 일터로 향하느라 바쁠 테고, 여행객이라면 한 곳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마음이 급할 것이다. 차림새로 뉴욕 시민과 여행객을 어렴풋이 구분하지만 둘 다 서두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모두가 바삐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나는 여유롭다.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일종의 예행연습으로 봄에 본격적으로 미국 동부를 여행하기 전 사전 답사의 성격이 더 강하다. 때문에 일정이 어그러지거나 사정상 가지 못하게 된 곳이 있어도 크게 아쉽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고 '다음번에 가지, 뭐' 하고 쿨하게 넘길 수 있었다. 다음 기회가 있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거리를 돌아보자 급히 다녔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사소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고층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예쁜 골목길이라던가, 짙은 구름 사이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파란 하늘이라던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조금 쓸쓸해 보이지만 그게 또 겨울다워서 좋았던 공원 풍경 같은 것들이. 느린 걸음으로 음미해야 비로소 여행지의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 목적지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었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뉴욕의 공원 풍경. 급히 삼킨 음식처럼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여행이 되지 않으려면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사실 다음이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인생이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막상 내년에 몸이 아프다거나 혹은 천재지변이 발생해서, 그도 아니면 망할 코로나의 제타 변이라도 나타나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 해도 이번 여행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시는 뉴욕에 오지 못할 사람처럼 유명 관광지를 찍고 다니면서 정작 한 군데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면 그것을 더 후회하지 않았을까. 그저 마지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깊게 음미했던 순간들에 대한 만족감이 더 커진다는 것을 깨닫자 앞으로의 여행이 어때야 할지 분명해졌다. 나는 그곳이 어디든 느리게 걷기로 했다. 마치 모든 여행에 약속된 다음이 있는 것처럼.




흔히들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생각하라고 하는데 이는 매일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지 마지막이니 그간 못 해본 것들을 허겁지겁 다 해치우라는 의미는 아닐 게다. 정말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하면 미친 듯이 맛집과 핫 플레이스를 찾는 사람들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며 조금이라도 마음속 깊이 담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여행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대다수의 여행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욱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 낯선 풍경이 나를 따라올 수 있도록. 잠시 멈춰 선 그 순간 여행지는 성큼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 기억이 무엇보다 오래 머물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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