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조지아의 북쪽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원래는 새해 아침에 조지아주에서 가장 높은 곳인 <브래스타운 볼드>에서 일출을 보려고 근처 숙소를 예약했었는데 날씨가 안 좋다는 예보에 일정을 미룬 것이 바로 오늘이다. 당시엔 충동적으로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가게 될 줄 모르고 며칠만 뒤로 연기했는데 뒤늦게 취소하려니 수수료가 너무 비싸서 그냥 다녀오기로 했다. <브래스타운 볼드>는 별을 관찰하기 좋다고 하는데 마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달도 초승달이니 별을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그래, 그냥 한 번 가보자.
<브래스타운 볼드>는 조지아주의 북쪽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집에서는 2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라 다녀오는데 큰 부담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햇살을 받으며 한참을 신나게 달리는데 어라, 이상하다. 앞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비상등을 켰다. 가만 보니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가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다녀온 사이 이곳을 덮친 토네이도 때문에 나무들이 많이 쓰러져서 여러 곳이 복구작업 중이었는데 마침 이 길도 피해지역 중 한 곳이었나 보다. 한참 작업을 하던 인부가 아무래도 복구에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다른 길로 우회하라고 안내했다. 문제는 이곳이 숲 속이라 인터넷 연결이 안 돼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 미국 국립공원 안에서는 간혹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우리는 지도를 보며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매번 돌고 돌아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마법의 미궁 속에 빠진 듯 한 기분에 당황하다가 아예 멀리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예전에 갔던 헬렌을 경유하기로 했다. 다행히 숲을 벗어나자 인터넷이 다시 잡혀서 우리는 헬렌을 거쳐 <브래스타운 볼드>로 향했다.
시간은 좀 걸렸어도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니 그나마 안도가 된다. <브래스타운 볼드>로 가는 길은 며칠 전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어 더할 나위 없이 예쁘다. 조지아주에 눈이 내리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라던데 이렇게 눈을 볼 수 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웬걸. 그 눈 덕분에 이번에는 <브래스타운 볼드>로 오르는 도로가 막혀있다. 산 정상이라 가파르고 위험해서 그런지 아예 차량 출입을 막아 놓은 모양이다. 아래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걸어가는 것은 도저히 무리이다. 이번 여행은 어째 뜻대로 되지를 않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향했다.
§ <브래스타운 볼드>로 가는 길의 나무들이 눈에 뒤덮인 모습. 조지아주에서 이런 설경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한편 숙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브래스타운 볼드>와 제일 가까운 곳으로 예약했는데, 도착해보니 채투지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시설은 다소 낡았지만 저렴한 데다 벽난로가 아늑하고, 무엇보다 1층 레이크 뷰 룸에서 바로 정원으로 나갈 수 있어 편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숙소로 잡은 <Lake Chatuge Lodge>는 주변이 트인 호숫가에 위치해 있어 아쉬운 대로 별과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는데 실제로 와보니 베란다와 정원이 연결되어 있어 풍경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 별을 보러 나왔는데 호수 주변은 물안개가 자욱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맑아서 즐겁게 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일기예보는 내일도 맑다고 했으니 힐튼헤드 아일랜드에서 보지 못한 일출을 이번엔 기어코 보고 말리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물안개가 다행히 아래쪽에만 머물러 주어서 별구경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나무 위로 오리온자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빛이 없고 공기가 맑았던 옛 선조들의 밤하늘은 매일 이보다 더 황홀했겠지. 이런 하늘 아래서 어떻게 수많은 이야기와 신화가 탄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음날 결국 일출을 보았냐면, 아니요. 이번 시도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맑다던 일기예보와 달리 채투지 호수 주변은 구름이 가득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출을 보는 게 이렇게나 힘든 미션인 줄은 진정코 몰랐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일출을 본 건 한 번뿐이다. 미국에서 두 달 만에 보려는 것이 오히려 욕심이겠지. 우리는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 숙소의 베란다에서 바라본 채투지 호수의 전경. 위에서부터 차례로 저녁, 한밤, 아침에 찍은 사진 들로 모든 시간이 각각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없이 호수를 바라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 일출을 보겠다는 계획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실패한 만큼 도전도 계속될 테니까.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성공하겠지. 한편 북반구에서 은하수는 여름에 잘 보인다고 하니 하절기에 <브래스타운 볼드>를 다시 찾는 것도 좋을 것 같다.그때는 꼭 구름뒤에 숨지 말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 주었으면. 나는 몇 번이고 반할 준비가 되었으니.
§ 채투지 호수는 채투지 댐을 만들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조지아주 북쪽과 노스 캐롤라이나 남쪽에 걸쳐있다. 위 사진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바라본 채투지 호수. 같은 호수여서 다를 리가 없는데도, 주가 달라서 그런지 왠지 다른 느낌이 든다. 낮이 되어 기온이 오르자 아침의 구름은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끝도 없이 푸르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평온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