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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17. 2022

보스턴 미술관을 거쳐 뉴욕으로

다시 뉴욕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무척 분주하다. 보스턴 미술관을 관람한 후 뉴욕으로 긴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데다 미국에서 기차를 타보는 것이 처음이라 혹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탓에 괜히 마음이 더 급해지는 기분이다. 서둘러 미술관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일러 그런지 다행히 대기줄이 길지 않아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미술관은 보스턴 시내와 달리 한산하고 평화롭다. 미술관에서는 상설전시 이외에 윌리엄 터너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시간이 촉박한 탓에 특별전은 포기하고 상설전시만 관람해야 했다.


§ 보스턴 미술관의 전경.  미술관 정면에 윌리엄 터너 특별전을 알리는 배너가 길게 붙어있다.


보스턴 미술관은 미국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만큼 다양한 소장품을 자랑하는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국 등 지역별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어 관심 있는 지역을 골라서 관람할 수 있다. 한편 고대 유물 쪽에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대한 그리스 석상이 가득한 전시실에는 어린 학생들이 자리하고 앉아 열심히 데생을 하고 있었다. 아시아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 이슬람 지역 예술품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어 인도인을 쏙 빼닮은 미남형 불상과 초상화가 금지된 탓에 발달한 이슬람의 수려한 캘리그래피 등을 관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미술관 내부 천장의 모습과 유럽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조각상. 유럽의 미술품은 아무래도 기독교 관련 작품들이 많은데 비잔틴의 초기 기독교 미술작품과 이집트의 콥트교 유물 같은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 힌두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신이라는 가네샤와 한국관의 간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그래도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할 만큼의 유물은 갖추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적어도 뉴욕 자연사박물관보다는 낫다.


미술관은 시종 조용하고 한산했는데 갑자기 떠들썩한 구역이 나타나 뭔가 했더니 이집트관이었다. 각종 석상과 상형문자가 새겨진 석판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미국인들에게도 이집트 유물은 생소한지 바글바글 모여 얘기를 나누며 관람하고 있었다. 언젠가 피라미드에 들어가면 관람객들이 하도 떠들어서 미라가 깨어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 미라가 있었다면 눈을 번쩍 떴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미국관에는 고급스러운 붉은 벽면을 회화 작품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데 나는 미국 화가들에 조예가 없는 관계로 화가들의 이름이 모두 생소해서 크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 미국 회화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실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미국 화가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큰 흥미를 못 느꼈고 그나마 유럽 회화 코너에 밀레나 루벤스, 피카소 같은 이름을 들어본 화가들의 작품이 있어 그런 작품을 중심으로 관람했다.


미술관이 상당히 커서 꼼꼼히 보지 않았는데도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려 서둘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미국의 기차는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아 서둘러 가는 게 좋다길래 기차역에 여유 있게 도착했는데 막상 와보니 트랙 번호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참 동안 전광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트랙 번호가 뜨기만을 기다리던 승객들이 번호가 뜨자마자 캐리어를 끌고 미친 듯이 뛰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덩달아 뛰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둘러보니 남은 자리가 제법 보인다. 대체 왜 뛴 걸까 궁금해하며 푹신한 좌석에 몸을 파묻고 숨을 골랐다. 뉴욕까지 4시간이나 걸리기에 비즈니스석으로 예약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막상 타보니 코치석도 KTX보다 훨씬 넓고 편해서 굳이 돈 들이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South Station>. 이 기차가 뉴욕을 거쳐 워싱턴 DC까지 간다. 장거리 여행객이 많은지 좌석 위 짐칸도 캐리어가 너끈히 들어갈 만큼 크고, 좌석도 넓고 푹신해 편안히 여행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는 인터넷이 아주 느려서 미리 다운로드해 놓은 전자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웃인 그레이스가 아주 감명 갚게 읽었다고 추천한 <해녀들의 섬>이라는 작품으로 미국 작가 <리사 시>의 소설인데 제주 해녀들의 삶과 4.3 항쟁 등에 대한 내용을 실감 나게 담아냈다. 오랜만에 한글로 된 책을 읽으니 술술 읽혀서 좋기는 한데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읽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번역을 할 때는 외국어 실력 이상으로 한국어 실력도 훌륭해야 함을 새삼 느끼며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사이에 어느새 기차가 뉴욕 펜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서자 익숙하지만 여전히 적응은 되지 않는 거친 도시의 소음이 기다렸다는 듯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언제나 요란한 뉴욕의 인사를 다시 만나 반갑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다시 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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