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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15. 2022

자유와 지성의 길을 따라서

보스턴 시내와 하버드대학교

어제저녁에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궂고 쌀쌀했는데 하루 만에 날씨가 바뀌어 따사로운 봄볕이 기분 좋게 쏟아지고 있다. 어제 공항 키오스크에서 이상하게 러기지 택이 출력되지 않아 고생 끝에 간신히 비행기를 탄 것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오늘은 작년 말부터 날이 풀리는 대로 꼭 해보겠다고 별러왔던 미국 동부 여행의 첫날이다. 보스턴에서 시작해 기차를 타고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를 거쳐 워싱턴 DC까지 내려오는 긴 일정의 여행이다. 이번 여행의 불운은 애틀랜타 공항에서 모두 끝났기를 바라며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첫 일정은 미국의 초기 이주민들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Boston Freedom Trail>을 따라 걷는 것이다. 보스턴 커먼에서 시작해 길을 따라 걸으며 각종 유적지를 차례로 들러 볼 수 있는 2.5마일 정도의 트레일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코스이다. 이 코스를 따라 식민지 시대 복장을 한 가이드들이 안내하는 2시간짜리 워킹 투어도 많이 진행되는데, 나는 영어로 설명을 잘 알아들을 자신이 없어 비지터 센터에서 파는 지도를 보며 돌아다녔다. 오래된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 보스턴의 유적지들도 작은 구역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고층 건물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한 옛 건물들이 이색적이기도 하다. 흔히 외국인들이 서울에 오면 현대식 건물과 유적지가 섞여 있어 매력적이라고 한다던데 바로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 왼쪽 위가 <Boston Freedom Trail>을 알리는 표시로 이 타일만 따라서 걸으면 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내가 보스턴에 간다고 하니 이웃인 제니퍼가 자기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보스턴을 다녀왔다며 학교에서 보통 보스턴을 많이 간다고 얘기해 주었는데, 과연 실제로 와보니 보스턴 거리 곳곳이 온통 투어를 하며 자국의 역사를 배우려는 미국인들로 넘쳐났다. 시간의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경주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트레일을 따라 주정부 청사, 옛 시청과 학교 건물, 묘지, 교회, 영국군에 의한 학살 장소 등을 둘러본 후 퀸시 마켓에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미국 사람들처럼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며 피로를 풀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자 약간 허기가 져서 보스턴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클램 차우더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1826년에 문을 연 보스턴에서 제일 오래됐다는 식당 <Union Oyster House>에서 클램 차우더를 먹어보고 싶었으나 대기가 너무 길어 포기하고 퀸시 마켓에 있는 식당에서 가볍게 요기를 한 후 <보스턴 차 사건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기념품 샵에는 각종 차와 다기, 마그넷 등의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차 꾸러미를 집어던지는 모양의 귀엽고 도발적인(?) 마그넷도 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공원에 누워 체력을 충전하는 중. 오른쪽이 <보스턴 차 사건> 박물관인데 말이 좋아 사건이지 그냥 세금 내기 싫어서 난동 부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다. 물론 수질이 안 좋아 차를 마실 수밖에 없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차에 세금을 매긴 것부터가 애당초 얍삽하기는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예민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박물관을 나온 뒤 전철을 타고 하버드대학교로 이동했다. 2~30분 정도 지나 하버드 역에 내리자 바로 앞에 하버드대학교의 정문이 보였다. 교정이 너무 커 어차피 다 돌아볼 수는 없기에 나는 유명한 하버드 동상의 발을 만져보기도 하고 도서관 계단에 잠시 앉아도 보았다가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의 똑똑한 기운을 듬뿍 받고 싶은 마음에 이유도 없이 캠퍼스 안의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를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정문의 맞은편에는 하버드대학교의 기념품샵인 <Coop>이 크게 있는데 디자인들이 대체로 썩 예쁘지 않고, 간신히 찾아낸 마음에 드는 상품은 사이즈가 없어 살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서려다 그래도 언젠가 하버드 출신이라고 사칭이라도 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 티셔츠만 한 장 사들고 나왔다. 물론 사칭을 해도 영어를 못해서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 발을 만지면 하버드에 간다는 속설 때문에 너도나도 만져대서 오른쪽 발만 금색이 된 하버드 동상과 고풍스럽고 예쁜 하버드대학교의 캠퍼스. 조금 더 멀리 나가 로스쿨 쪽으로 가면 현대적인 건물도 많아서 전체가 다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무 그늘이 너무 많아서 캠퍼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기 어려워 아쉬웠다.


시 보스턴 시내로 돌아와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노스 엔드의 바닷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일몰 뷰로 유명한 <룩아웃 루프탑>에 가고 싶었으나 그곳 역시 예약이 모두 마감되어 다른 일몰 포인트인 찰스 강과 노스 엔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숙소와 가까운 곳으로 갔는데, 안타깝게도 노스 엔드에서는 일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몰을 보려면 찰스 강이나 현대미술관이 있는 씨포트 디스트릭트(Seaport District)쪽이 을 것 같다. 보스턴이든 어디든 관광지에서 예약은 필수인 것 같은데 늘 즉흥적으로 정하는 우리는 뒷북을 치기 일쑤라 유명한 곳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방문하는 여행객은 어차피 비교의 대상이 없기에 내가 맛있게 먹고 즐겁게 봤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아주 약간의 아쉬움만 품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 오늘의 아쉬움은 내일 채워나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 해질 무렵의 노스 엔드. 보스턴의 봄밤이 달콤하게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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