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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23. 2022

멀리서 보아야 사랑스럽다

뉴욕, 너도 그렇다

뉴욕의 하루는 소음으로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경적소리에는 운전자의 짜증이 그대로 묻어 있고, 거기에 간간히 사이렌 소리와 누군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 흥겨운 음악소리까지 섞여 평화로운 아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뿐이랴. 밖으로 나서면 묘한 악취가 감도는 거리는 관광객들이 가득해 가뜩이나 걷기도 힘든데 사방이 공사 중이라 한 블록을 지나는 데도 하세월이다.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눈앞을 날쌔게 지나가는 통통한 쥐 한 마리. 대체 이곳이 내가 다시 오고 싶어 했던 그 도시가 맞나 싶다. 뉴욕의 첫 느낌은 늘 약간 실망스럽다.


하지만 일단 도시 안으로 들어서면 지저분함과 소음에도 그럭저럭 적응이 되고, 관광객의 바쁜 일정이 그런 것에 계속 신경을 쓸 만큼 여유를 허락하지도 않아 일단은 다 잊고 다니게 된다. 뉴욕은 크기도 하고 할 것이 넘쳐나 두 번째 방문인데도 분주히 다녀야 오늘 계획한 것을 간신히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 일정은 뮤지컬 관람이다. 원래 보고 싶었던 작품은 휴 잭맨이 공연하는 <뮤직 맨>인데 유명 배우의 공연이라 그런지 아니면 너무 늦게 알아본 탓인지 한 장에 60~70만원짜리 표만 남아있어 깨끗이 포기하고 보다 가족적인 뮤지컬 <알라딘>을 보기로 했다. 내용도 다 알고 미국에 온 지 반년은 되었으니 작년에 <물랑 루즈>를 볼 때 보다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지니의 대사가 래퍼 수준이라 여전히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 다시 찾은 브로드웨이. 코로나가 좀 잦아든 탓인지 작년 말에 왔을 때보다 관광객이 훨씬 많다. 알라딘이 노래를 굉장히 잘하는데 반해 재스민은 가창 실력이 부족해서 아쉬웠지만 노래들이 모두 익숙한 데다 내용이 흥겨워 재밌게 관람했다.


뮤지컬 관람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조금 내려와 첼시 마켓으로 향했다. 오후에 소나기 예보가 있어 실내로 피신하려고 알아본 첼시 마켓은 맛집도 많고 아기자기 귀여운 물건을 파는 상점도 많은 데다 마켓 자체도 예뻐서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 나는 일단 <팻 위치> 베이커리에 들러 브라우니를 하나 사고 마켓을 둘러보다가,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가 너무 좋아 계획을 바꾸어 브루클린 다리를 보러 가기로 했다. 다리를 가려면 뉴욕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와야 하기에 다음 일정이 아슬아슬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이동을 했다. 그런데 웬걸, 다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구경은 고사하고 발 디딜 틈도 없다. 언젠가 퓰리처 사진전을 갔을 때 한국 전쟁 중 피난민들이 다리를 가득 메운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상상한 브루클린 다리는 이게 아닌데. 나는 다리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돌아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 빨간 벽돌 건물이 예쁜 첼시 마켓과 사람이 없는 틈을  간신히 찍은 브루클린 다리. 첼시 마켓은 생각보다 커서 제대로 구경하려면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 관광지인 데다 주말까지 껴서 그런지 어디를 가나 붐비기는 했으나 브루클린 다리는 내 예상을 초월하는 인파였다. 뭐, 나도 관광객 중 하나이니 할 말은 없다마는.


다리를 나와 마지막 일정인 나이트 크루즈를 타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빼기 어려워 배에서 먹으려고 <롬바르디스>에서 피자를 사들고 출발했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브루클린 다리에서의 인파를 고려하면 배에도 사람이 많을 터였다. 선착순 탑승이라 늦으면 타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예약 시간 30분 전에 항구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는데, 어쩐지 30분 가지고는 택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마음은 초조한데 지하철은 자꾸 지연이 되고, 택시는 너무 가깝다며 승차거부를 하는 데다 항구까지 가는 버스는 도무지 올 생각을 않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항구까지 20분 거리를 걷다 뛰다 하며 가야 했다. 출발 15분 전에 간신히 도착해 가쁜 숨을 고르며 예약 바우처를 승선표로 바꾸고 탑승하려는데 이번에는 가방 검사를 한다. 알고 보니 소다와 음식물 모두 반입 금지였던 것. 나는 힘겹게 사들고 온 피자를 버리기가 아까워 한 조각 떼어내 입에 욱여넣고 나머지는 눈물을 흘리며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배에 올라탔다. 피자를 사지 않았다면 이렇게 뛰지 않아도 됐을 텐데 결국 먹지도 못 할 피자 때문에 고생한 게 우습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 식은 피자가 맛있어서 놀래기도 하며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 간신히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출발을 했다. 7시가 출항 시간인데 해가 8시에 지기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허드슨 강을 따라 내려가다 해 질 무렵에 맞추어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보는 코스로 뉴욕 유람선 중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한다. 배에서 바라보는 브루클린 다리는 평화롭다. 하지만 저 다리 위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저녁 바람을 부드럽게 가르며 허드슨 강 위로 배가 미끄러져 나가자 도시의 소음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강의 폭만큼 고요함이 찾아오고 어둠의 장막이 도시의 더러움을 가리자 비로소 뉴욕이 다시 반짝인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하던데 뉴욕을 웃으며 보려면 인생을 관망할 때만큼의 거리가 필요한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던 나태주 님의 시를 좋아하지만 뉴욕은 한 발 물러서서 보아야 한다. 물러선 한 걸음만큼 뉴욕을 더 사랑하게 될 테니까.


§ 작년 겨울에 추워서 보지 못했던 자유의 여신상을 드디어 만났다. 날이 맑으면 노을을 볼 수 있다는데 이날은 구름이 많아 붉은 하늘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그 전 날도 다음 날도 밤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이 숨이 멎을 만큼 황홀했던 건 빌딩의 꼭대기와 맨해튼 길거리 사이가 숨이 멎을 만큼 멀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시간의 유람을 마치고 배가 항구에 들어섰을 때 아침에 느꼈던 약간의 실망은 어느새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나는 봄바람에 마음이 녹은 탓인지 뉴욕의 불빛에 눈이 먼 탓인지 그저 행복에 취해 있었다. 내일 아침 호텔을 나설 때의 기분은 오늘과 분명 다르리라는 기분 좋은 예감을 품고 숙소로 향했다.


§ 나이트 크루즈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 뭐니 뭐니 해도 야경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역시 뉴욕에서는 하늘 높이 치솟은 마천루에 오르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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