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3.1 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시회인 <대한콜랙숀> 을 감상하던 중의 일이다. 전형필 선생의 심미안에 누가 의문을 품을까마는, 작품들마다 근사하고 멋지기는 한데 그렇다고 천지가 개벽할 듯한 감동을 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아, 멋지다'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작품을 설명하던 도슨트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작품을 보고 크게 감탄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모던한 작품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몇 백 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건 당시로써는 정말 충격적인 시도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작품이 비로소 완전히 달라 보였다. 성질이 다른 안료를 사용해 어렵사리 세 가지 색을 완벽히 구현해 놓고, 누가 그 주둥아리를 뚝 하고 잘라 만들 생각을 했겠는가 말이다. 그야말로 18세기 조선 모더니즘의 정수였다.(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 이름도 기나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으로 이름을 클릭하면 볼 수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시대를 앞서 나간 시도를 하는데 일부 작품들은 너무 앞서 나간 탓에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어떤 작품들은 덜 앞서 나간 탓에 진부하게 느껴져 외면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로 미술사를 변화시킨 작품들이 끊임없이 탄생해 왔으니, 우리는 오늘 이 작품들을 만나러 뉴욕현대미술관을 찾아갔다. 뉴욕현대미술관의 작품들은 이미 교과서에서 질리도록 봐온 터라 대단한 감흥 없이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몇 년 전 도슨트의 말 대로 작품이 제작되었던 당시를 떠올리며 감상하려 노력했다. 대상의 앞면과 옆면이 한 화면에 담긴 그림을 처음 본 것처럼, 아무런 주제 없이 오로지 형과 선과 면 만으로 미술의 본질을 담아낸 그림을 처음 접한 것처럼, 또는 슈퍼마켓에서 매일 보던 깡통들을 미술관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사람처럼. 미술 작품을 대할 때는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보다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 뉴욕현대미술관도 미국자연사박물관만큼 사진 촬영이나 반려동물 동반이 자유롭다. 이때다 싶어 처음엔 열심히 찍었는데 유명한 작품이 하도 많다 보니 다 찍을 수가 없어 나중에는 포기하고 눈으로만 잘 감상했다. 위 사진들은 관람 초반에 찍은 미로,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피카소의 작품들.
한편 추상화들은 보다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진심으로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제목이라도 있으면 추측이라도 해 볼 텐데 태반이 무제이거나 작품번호만 붙어 있으니 가끔은 작가들이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나 혼자 작품에 <혼돈의 카오스> 같은 제목을 붙여가며 재밌게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어차피 우리 중 대다수는 미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 또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 나는 정말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다들 좋은 작품이라 추켜세운다고 같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마지못해 관람하는 것보다는 그냥 내 마음에 드는 작품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 감상하는 편이 나에게는 더 맞는다. 나는 일부 작품들 앞에 머무르기도 하고 또 일부는 지나쳐 가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미술관 안을 어슬렁거렸다.
§ 잭슨 폴락의 작품 앞에 앉아 쉬고 있는 남편. 필시 혼돈의 카오스를 느끼고 있었을게다. 허나 열심히 감상 중이라고 착각한 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뒷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남편은 잭슨 폴락은 고사하고 현대 미술의 ㅎ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미술관에만 오면 급속히 지친 땡벌이 되어 버리는 남편 덕분에 분위기 있는 사진은 한 장 건졌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고. 다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첫 시도들을 한 작품들을 만나고, 상상하고, 번화한 뉴욕 한 복판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비록 미술에 문외한이라 한 명의 관람객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언젠가 이 작품들을 보고 자라난 누군가가 새로운 시도로 또 다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주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오늘 나와 이 공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미래의 개척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미술관을 나섰다.
§ 미술관의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의 거리 풍경도 근사하다. 한편 작품 사이를 한가로이 걷는 사람이 분위기 있어 보여 찍어 봤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사람도 그저 화장실에 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석은 감상자에게 달려있으니 나는 멋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혹은 미래의 개척자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