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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Dec 12. 2021

백만 개의 별들 위에서

뉴욕의 밤은 대낮같이 밝다

12월의 뉴욕은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져서 밤이 길고도 길다. 보통 동절기 여행자는 짧은 낮을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오직 뉴욕을 여행하는 사람들만 이 아쉬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 뉴욕은 밤에 더욱 빛이 나기에. 우리는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랐다. 본격적으로 전망대에 오르기 전 박물관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는 영화 <킹콩>이나 다양한 작품에 등장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전망대에 오르면 영화 같은 것은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풍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뿐. 나뿐 아니라 전망대의 모든 관광객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며 날뛰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람이 센 뉴욕인데 고층 빌딩이다 보니 기껏 눌러쓴 모자가 돌풍에 벗겨져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백만 개의 별들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 뉴욕의 낮과 밤은 각기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나는 밤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든다. 어디를 가든 밤의 풍경은 묘하게 더 낭만적이다. 그것이 밤이라는 시간이 우리 영혼을 무방비로 만들어서인지, 혹은 보석처럼 찬란한 불빛에 홀려 약간의 이성을 놓아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편 매일 밤 브로드웨이의 거리는 각종 공연장을 찾은 관람객들로 더욱 붐빈다. <라이온 킹>이나 <오페라의 유령> 같은 작품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이미 봤던 터라 우리는 <물랑 루즈>를 선택했다. 영화로 본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당시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어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관람이 되었다. 영화의 오리지널 노래들에 더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듯 레이디 가가, 비욘세, 시아 등 유명가수들의 대표곡을 섞어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우리가 미국의 팝송을 더 잘 알았다면 배로 즐거웠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노래를 잘 모른다 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흥겹고 매력적인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한편, 남자 주인공 크리스챤 역을 맡은 배우 Aaron Tveit의 노래 실력은 여태껏 내가 봐 온 그 어떤 뮤지컬 배우보다 뛰어났는데, 알고 보니 2021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단한 배우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앙졸라 역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공연이 꽤 늦은 시간에 끝이 났는데도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두워지면 바깥 활동을 못하는 미국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뉴욕만의 매력이다. 눈부신 야경과 신나는 공연에 더해 오랜만에 밤 시간의 자유까지 만끽하니 들뜬 기분이 밤새 가라앉지 않았다.

§ 뮤지컬 <물랑 루즈>는 온통 빨간색으로 관객을 매혹한다. 원작 영화에 못지않게 무대는 화려하고 춤은 현란하며 음악은 매혹적이다. 창녀와 가난한 시인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와 이미 익숙한 팝 음악을 가지고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부럽다.


살인의 죄도 더 빨리 드러나지는 못하리. 숨기고 싶은 사랑보다는. 사랑의 밤은 대낮같이 밝다. - 셰익스피어, <십이야 혹은 그대의 바람>


흔히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들 한다. 셰익스피어는 뻔한 인간의 심리를 늘 번뜩이는 문장으로 뻔하지 않게 표현 내는데, 너무 쉽게 드러나버리는 사랑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근사하게 옮겨 놓았다. 뉴욕의 밤이 대낮같이 밝은 이유도 어쩌면 이 도시에 모인 사람들의 뉴욕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 때문 아닐까. 태양이 지구 반대편으로 몸을 숨겨도 이 도시의 매력은, 그리고 뉴욕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기어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온다. 대낮같이 밝아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뉴욕의 밤거리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이 도시에 사랑 고백을 하고 말았다. 거리 곳곳의 간판에서는 <I ❤ NY>라고 쓰인 문구가 쉴 새 없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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