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뉴욕은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져서 밤이 길고도 길다. 보통 동절기 여행자는 짧은 낮을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오직 뉴욕을 여행하는 사람들만 이 아쉬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 뉴욕은 밤에 더욱 빛이 나기에. 우리는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랐다. 본격적으로 전망대에 오르기 전 박물관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에는 영화 <킹콩>이나 다양한 작품에 등장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전망대에 오르면 영화 같은 것은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풍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뿐. 나뿐 아니라 전망대의 모든 관광객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며 날뛰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람이 센 뉴욕인데 고층 빌딩이다 보니 기껏 눌러쓴 모자가 돌풍에 벗겨져 머리가 산발이 되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백만 개의 별들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바라본 뉴욕의 야경. 뉴욕의 낮과 밤은 각기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나는 밤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든다. 어디를 가든 밤의 풍경은 묘하게 더 낭만적이다. 그것이 밤이라는 시간이 우리 영혼을 무방비로 만들어서인지, 혹은 보석처럼 찬란한 불빛에 홀려 약간의 이성을 놓아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편 매일 밤 브로드웨이의 거리는 각종 공연장을 찾은 관람객들로 더욱 붐빈다. <라이온 킹>이나 <오페라의 유령> 같은 작품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이미 봤던 터라 우리는 <물랑 루즈>를 선택했다. 영화로 본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당시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어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관람이 되었다. 영화의 오리지널 노래들에 더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듯 레이디 가가, 비욘세, 시아 등 유명가수들의 대표곡을 섞어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우리가 미국의 팝송을 더 잘 알았다면 배로 즐거웠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노래를 잘 모른다 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흥겹고 매력적인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한편, 남자 주인공 크리스챤 역을 맡은 배우 Aaron Tveit의 노래 실력은 여태껏 내가 봐 온 그 어떤 뮤지컬 배우보다 뛰어났는데, 알고 보니 2021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대단한 배우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앙졸라 역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공연이 꽤 늦은 시간에 끝이 났는데도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두워지면 바깥 활동을 못하는 미국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뉴욕만의 매력이다. 눈부신 야경과 신나는 공연에 더해 오랜만에 밤 시간의 자유까지 만끽하니 들뜬 기분이 밤새 가라앉지 않았다.
§ 뮤지컬 <물랑 루즈>는 온통 빨간색으로 관객을 매혹한다. 원작 영화에 못지않게 무대는 화려하고 춤은 현란하며 음악은 매혹적이다. 창녀와 가난한 시인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와 이미 익숙한 팝 음악을 가지고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부럽다.
살인의 죄도 더 빨리 드러나지는 못하리. 숨기고 싶은 사랑보다는. 사랑의 밤은 대낮같이 밝다. - 셰익스피어, <십이야 혹은 그대의 바람>
흔히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들 한다. 셰익스피어는 뻔한 인간의 심리를 늘 번뜩이는 문장으로 뻔하지 않게 표현 내는데, 너무 쉽게 드러나버리는 사랑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근사하게 옮겨 놓았다. 뉴욕의 밤이 대낮같이 밝은 이유도 어쩌면 이 도시에 모인 사람들의 뉴욕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 때문 아닐까. 태양이 지구 반대편으로 몸을 숨겨도 이 도시의 매력은, 그리고 뉴욕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기어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새어 나온다. 대낮같이 밝아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뉴욕의 밤거리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이 도시에 사랑 고백을 하고 말았다. 거리 곳곳의 간판에서는 <I ❤ NY>라고 쓰인 문구가 쉴 새 없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