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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25. 2022

뉴욕을 달리다

센트럴파크에서 자전거 타기

따사로운 5월에 다시 뉴욕을 찾은 이유는 센트럴파크에서 자전거를 타보고 싶어서 이다. 아직 기온이 높지 않아 자전거를 타기 딱 좋기는 한데 일기예보를 보니 드문드문 소나기 소식이 있다. 나는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몰라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공원 근처에 시티 바이크 스테이션이 많아 적당한 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달리기 시작했다. 공원이 크게 붐비지도 않고 자전거 도로도 잘 되어 있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그런데 보기와 달리 오르막이 제법 있어 조금 달리자 허벅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아 일반 자전거라면 수월하게 오를 수 있겠지만 공유 자전거가 워낙 무거운 데다 기어가 시원치 않아 약간의 업힐 코스도 힘에 부친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아예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나는 오기가 일어 끝까지 내리지 않고 어떻게든 페달을 굴러 느릿느릿 언덕을 올랐다.


§ 뉴욕에도 마이애미처럼 도시 곳곳에 시티 바이크가 마련되어 있어 자전거를 달리며 뉴욕을 즐기는 색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오른쪽은 자전거를 타다가 잠시 멈춰 구경한 <벨베데레 캐슬>의 모습.


힘겨운 업힐 코스가 끝난 후 내리막이 나타나면 다리에 힘을 빼고 안장에 앉아 속도를 즐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인데 그 짧은 새에 모든 피로가 씻겨나갈 만큼 기분이 짜릿하다. 자전거에 속도가 붙을수록 좌우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갈라진 나뭇잎들 사이로 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비로소 내가 뉴욕 한복판을 달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푸른 잔디밭과 호수, 구름을 품은 하늘, 공원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높게 솟은 빌딩들. 자전거 위에서 만끽한 모든 순간에 뉴욕이 담겨 있었다.


§ 호수 너머로 보이는 뉴욕의 전경. 규모가 너무 커서 걸으면서 봤다면 시간이 부족하거나 다리가 아파 놓쳤을지도 모르는 풍경들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공원을 절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성한 나뭇잎 아래로 몸을 숨기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비였는지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비가 그치고 다시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변덕스러운 뉴욕의 봄 날씨 덕분에 조금 쉬어가게 되었다고 좋게 생각하며 빗물을 머금어 더욱 짙어진 공원의 녹음 사이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이 지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자 허기도 지고 두 다리도 뻐근해져 왔다. 우리는 센트럴파크에서의 즐거운 라이딩을 마친 후 근사한 스테이크로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했다.


§ 황금빛 복도가 아름다운 베레스다 테라스와 싱그러운 초록빛 공원 너머로 보이는 뉴욕 빌딩 숲의 대조적인 풍경.


뉴욕을 다시 찾은 이유 중 하나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가는 것이었기에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이 공원 바로 옆이라 시티 바이크를 거치대에 세워 놓고 약간 걸어가니 미술관 입구가 나타났다. 줄이 끝도 없이 길었던 <자연사 박물관>을 떠올리며 걱정했는데 다행히 미술관 앞에 사람이 별로 없다. 럭키를 외치며  입구로 들어 서려는데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미리 예약한 사람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당연하게도 오늘의 입장권은 이미 다 팔리고 없다. 그래서 미술관 앞이 한산했던 모양이다. 성급하게 럭키를 외칠 일이 아니었던 것.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어 대신 근처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유명한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현대 미술 작품이라 제대로 이해할 자신이 없어 망설여졌을 뿐, 미술관의 가치로서는 그 어느 곳 못지않으므로 목적지를 바꾸는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구겐하임 미술관>의 내부와 천정. 맨 위층에서부터 작품을 관람하며 나선형 복도를 따라 돌아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래층에는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모난 전시 공간도 있다. 즐길 거리가 워낙 많아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 비교적 빨리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뉴욕의 장점 중 하나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현재 칸딘스키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는데, 현대 회화 작품이 대체로 그렇듯 형체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던 우리는 좀 더 즐겁게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제목 맞추기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형태를 열심히 관찰한 후 각자 '붉은 원을 둘러싼 직선들'같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실제 제목과 비교해 더 비슷하게 추측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으로, 놀면서 관람하니 어려운 현대 미술도 조금은 재밌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름을 맞추느라 오랜 시간 고심한 작품의 제목이 '작품번호 8'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무함이란! 아무리 현대 미술이라 해도 '무제'나 '작품번호'같은 무성의한 제목은 좀 피해 주면 좋겠다. 물론 본인들도 제목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 보자마자 <광> 떠올랐던 칸딘스키의 작품 <Far away>와 진지하게 이름 맞추기 게임에 임하는 중인 남편의 뒷모습.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저녁 식사까지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려 하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날씨가 좋을 때 야외에서 계획했던 모든 것 - 자전거, 나이트 크루즈, 브루클린 다리 등 - 을 끝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거센 빗줄기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오늘 보지 못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언젠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 호텔을 향해 가볍게 뛰기 시작하자 발 밑에서 경쾌한 물소리가 찰박찰박 울려 퍼졌다. 나는 다시 한번 속도를 내 뉴욕 거리를 달렸다. 내리는 빗방울에도 뉴욕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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