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깼다. 연말이 다가오는데 애틀랜타에는 연일 거센 비가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 맞이하는 첫 새해에는 꼭 일출을 보고 싶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 며칠 째 계속되던 비 예보는 오늘 아침 급기야 토네이도 경보로 바뀌었다. 일출을 보지 못하면 하다못해 새해 전야의 카운트다운 행사라도 보고 싶은데, 2년 만에 재개된다던 피치 다운 행사 - 애틀랜타 다운타운에서 31일 자정에 조지아주의 상징인 복숭아 조형물을 떨어트리는 행사로 30년간 해마다 열린 나름 전통 있는(?) 행사라고 한다 - 도 오미크론으로 취소가 되고, 스톤 마운틴에서 하는 불꽃놀이도 천상 비 때문에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세상 모든 곳에서 비가 올 리는 없다. 비가 내리는 곳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 맑은 곳도 있겠지. 나는 부랴부랴 운전해서 갈 만한 거리의 지역 중 날씨가 괜찮은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닷가 쪽은 개는지 조지아주의남동쪽 해안도시인 서배너 근처는 비 소식이 없다. 31일 오후 2시 우리는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서배너 바로 위에 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힐튼헤드 아일랜드(Hilton head island). 조지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좌우로 서로 붙어 있어 서배너 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왼쪽은 조지아주이다. 힐튼헤드 아일랜드로 목적지를 정한 이유는 서배너의 타이비 섬에서 31일 자정에 불꽃놀이가 열리는데 힐튼헤드 아일랜드의 남쪽 해안에서도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힐튼헤드 아일랜드까지는 차로 5시간. 미국에서 장거리 운전은 처음이지만 언젠가는 시도해야 할 일이니 한 해의 마지막을 새로운 도전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출발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1시 30분쯤에 차를 몰고 남쪽 해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십분 쯤 지났을까. 길 앞에 요금소 같은 곳이 있다. 남쪽 해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현금으로 9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작은 섬에 유료도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데다 미국도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 현금이 들어 있는 지갑을 숙소에 두고 나와 수중에는 현금이 한 푼도 없었다. 카드 지불은 안 되냐고 물었지만 야박하게도 단번에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이제와 호텔을 다시 다녀오기엔 시간이 빠듯하다. 그렇다고 불꽃놀이를 보러 무려 5시간을 달려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호텔 근처의 콜리니 비치(Coligny beach)로 향했다. 해변은 온통 암흑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새해를 축하하러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뚫고 사방에서 들려왔다. 간간히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릴 때마다 까만 밤바다는일순 환해졌다 다시 어둠으로 빠져 들었다. 폭죽의 매캐한 연기를 바닷바람이 쓸어가고 나면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내일은 더 좋을 거예요
§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히고 파랗게 빛나는 새해 아침의 힐튼헤드 해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늘 이렇게 좋은 날들만 계속될 수는 없겠지만, 가끔 흐린 날이 찾아오더라도 이 바다를 떠올리며 궂은 날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싶다.
새해 아침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시간에 맞추어 바닷가로 나섰다. 그런데 두꺼운 구름이 하늘 가득 뒤덮여 있다. 나를 비롯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나온 사람들이 해변에 앉아 떠오를 해를 기다렸건만 구름은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고 허무하게 날은 밝아버렸다. 어떻게 모든 여행이 성공할 수 있겠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호텔로 돌아와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씻기 위해 다시 눈을 붙였다. 그런데 우리가 잠든 사이에 구름이 거짓말 같이 사라져 한 두시간 후 다시 호텔을 나섰을 땐 새파란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바다에 부딪혀 보석처럼 반짝이며 찬란히 부서졌다. 우리는 해변을 따라 걸으며 조금 더 일찍 개지 않은 하늘을 아주 잠깐 원망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이제라도 맑아진 것에 감사하며 섬에서의 남은 일정을 즐기기로 했다.
§ 힐튼헤드 아일랜드에는 야자수와 스패니시 모스 같은 한국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나무들이 가득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한다.
힐튼헤드 아일랜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만큼 한 겨울에도 푸른 야자수가 가득하다. 섬 곳곳의 나뭇가지마다 늘어진 스패니시 모스가 이국적인 정취를 더한다. 아무리 날씨가 좋다 해도 바닷바람이라 쌀쌀할 텐데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거나 민소매 차림으로 조깅을 한다. 한편, 이 섬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고 자전거 렌털 샵도 많아서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돌면서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닷가 모래가 단단해 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어서, 우리도 다음에 이곳을 올 때는 자전거를 챙겨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부 해안의 리조트에는 골프와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탁구와 테니스를 섞어 놓은 듯한 피클볼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두가 취향에 따라 여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얼굴은 건강한 미소로 가득했다.
§ 힐튼헤드 아일랜드의 겨울 바다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봄 바다를 닮았다. 바닷바람이 온기를 품어 쓸쓸하지 않으면서도 여름의 소란은 없는 다정한 봄 바다. 우리 모두의 새해가 이 푸른 하늘과 바다처럼 밝고 잔잔하기를 바란다.
우습게도 2022년을 콜리니 비치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맞이하고, 단돈 9달러가 없어서 불꽃놀이를 놓쳤으며, 왕복 10시간을 길에 쏟아붓고도 계획했던 일출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날 밤 바닷가에서 했던 내일은 더 좋을 거라는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여행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태양은 내일 또 뜨고, 한 해가 지나면 새해는 다시 찾아올 테지만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지금이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의 충동적이며 무계획한 여행을 마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순간에 충실하며 다가올 모든 시간을 맞이하겠다고. 분명 내일은 더 좋을 것임을 나는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