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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pr 05. 2022

내가 꿈꾸던 바다

샌디에이고에서 LA로

오늘은 해안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달리며 미국 서쪽의 바다를 실컷 눈에 담는 것이 목표이다. 샌디에이고와 LA가 가깝다고는 해도 중간중간에 비치를 들러서 올라가려면 하루의 일정을 빼놔야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가장 처음 들른 곳은 샌디에이고 바로 위에 있는 <라 호야 비치, La Jolla Beach>이다. 아침에 구름이 많고 날이 쌀쌀했는데도 바다에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법한 게 파도가 아주 좋아서 서핑의 ㅅ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오늘 같은 날 서핑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기는 했다. 서핑보드 위에서 솜씨 좋게 균형을 잡아가며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타고 내달리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언젠가 서핑을 배워보고 싶었는데 서핑이 취미인 친구로부터 젊었을 때와 달리 이제는 조금만 서핑을 해도 기미가 올라와서 잘 타지 않게 되었다는 슬픈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사회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우길 수 있을지 몰라도 신체적 나이는 잔인할 만큼 정직하다. 한편 차에서 내릴 때 실수로 파우치를 떨어트린 모양인데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바다에 다녀왔다. 그런데 차에 돌아오니 고맙게도 누군가 고이 주워서 사이드 미러 사이에 끼워 놓았다. 샌디에이고는 치안이 좋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샌디에이고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았는데 첫인상만큼 끝인상도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 파도가 끝내주게 좋았던 라 호야 비치. 신기하게도 미국 사람들은 추운 날 진짜 바다에서 잘 논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내 입장에서는 마냥 부러울 따름.


라 호야 비치를 뒤로하고 두 시간 정도를 달려 롱 피치 시티에 도착했다. 오후가 되자 구름이 모두 물러가서 하늘은 말할 수 없이 청명하다. 롱 비치는 이름대로 해변이 길게 이어져 있기에 마음에 드는 스폿을 골라 가면 된다. 나는 애완견 동반이 가능한 <로지스 비치, Rosie's Dog Beach>로 갔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귀여운 강아지들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바닷가에는 주인이 던진 공을 겁도 없이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어오거나 주인과 함께 프리스비를 하며 노는 개들로 가득하다. 한편 바다 위에는 패러세일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롱 비치는 기나긴 해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각자가 취향에 맞게 놀고 있는 광경이 마치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을 형상화해 놓은 듯하다. 역시 놀아야 인간이다. 나도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놀아야겠다.


§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롱 비치 시티. 자전거길과 산책길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파도가 달라서인지 서퍼들이 많았던 라 호야 비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롱 비치에서 한가로운 산책을 마친 후 다시 차에 올라 더 북쪽으로 달린다. 웨이페어러스 교회(Wayfarers chapel)가 예쁘니 들러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둥을 제외한 벽과 지붕이 투명해 파란 하늘과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독특하고 예쁜 건축물이었는데, 그보다 더 눈을 끈 것은 주변 풍경이다. 교회가 언덕에 있어서 멀리 <Portuguese bend>가 한눈에 보이는 데다 교회까지 가는 길 자체가 너무 예뻐서 돌아가느라 더 걸린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아깝기는 커녕 더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으니 누구든 LA를 가게 되면 이 교회를 꼭 들러보라고 말하고 싶다.


§ 웨이페어러스 교회에서 보이는 <Portuguese bend >와 투명한 교회의 모습. 교회까지 가는 도로의 한편은 푸른 바다, 다른 한편은 오밀조밀 주택이 자리 잡은 언덕과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드라이브하는 내내 예쁜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교회를 나설 즈음에는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마지막 목적지인 <산타 모니카> 해변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이 LA의 일몰 포인트라고 하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서두른 보람이 있었는지 시간에 딱 맞추어 바다에 도착했다. 아직은 날이 덥지 않아 그런지 한산한 해변에 사람은 거의 없고 키 큰 야자나무 몇 그루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후 발길을 돌렸다. 문득 몇 년 전 페루 여행을 갈 때,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잠시 LA   공항에 내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환승 시간이 좀 있어 산타 모니카 해변을 보고 돌아오고 싶었지만 괜히 나갔다가 악명 높은 LA의 교통 정체에 비행기를 놓칠까 지레 걱정이 되어서 결국 나가지 않고 공항에 머물렀었다. 그때만 해도 다시 LA에 올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그 바다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야구만은 아니기에, 오늘 내가 꿈꾸던 바다 앞에서 나도 저렇게 마지막까지 이글거리며 타올라야겠다고 다짐했다.


§ 산타 모니카 해변의 석양이 붉다.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타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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