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다. 그동안은간간히 주말이나 수업이 없는 시기에 짬을 내어 여행을 다녔는데, 이번에는 명색이 방학이라고 열흘에 가깝게 휴일이 주어졌기에 이때다 싶어 길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와이오밍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일정이 길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오랫동안 별러 오기만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주어진 방학이 고맙고 반갑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4시간 정도의 거리이기에 우선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 머물며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첫인상은 언덕이 많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지형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 때문인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높다란 언덕 위에는 각종 케이블들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얽힌 케이블 아래로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라는 케이블카가 힘겹게 언덕을 기어오른다. 달랑 한 량 밖에 되지 않는 케이블카에는 자리에 미처 앉지 못한 관광객들이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데 속도가 하도 느려서 떨어져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것 같다. 건물들은 동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언덕이 샌프란시스코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꾸물꾸물 지나가는 케이블카가 귀여워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보고 싶었는데 초상권 침해가 걱정돼서 카메라를 들 수가 없다.
§ 아기자기한 집들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롬바드 언덕. 케이블카는 롬바드 거리와 차이나타운 등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에 서기 때문에 편리하지만 가격이 1회 탑승에 무려 8달러나 해서 자주 타기는 부담스럽다. 요금은 샌프란시스코의 교통카드인 클리퍼 카드로 지불해도 되지만 탑승 후 차에서 표를 구입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급하면 일단 차에 올라타도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롬바드 언덕에서 내린 후 예쁜 거리를 거닐며 구경하다가 <피어 39>와 어부들의 선착장이었던 <피셔맨스 워프>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피어 39>는 복합 쇼핑몰이라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무리 지어 일광욕을 즐기는 바다사자를 보기도 좋아 관광객들이 북적댄다. 나도 바다사자를 보러 갔지만 열심히 걸은 보람도 없이 이 녀석들이 죄다 누워서는 등짝만 보여주고 꼼짝을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따듯하게 등 지지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 바다사자들이라고 다를까 싶기는 하다. 나는 바다사자들의 달콤한 낮잠을 깨우기 싫어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어 39> 앞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바다사자들과 평화로운 샌프란시스코의 바닷가 풍경
바닷가를 따라 한참을 걸어 소살리토로 가는 페리 보트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 터미널로 향했다. 소살리토는 버스를 타고 금문교를 건너갈 수도 있지만 배를 타고 보는 풍경이 근사하다고 하기에 자주 운행하지도 않는 배 시간을 굳이 맞추어서 배를 타는 쪽을 택했다(소살리토-샌프란시스코 유람선 운행시간과 탑승 장소, 운임은 편도 13.5달러로 다른 교통수단과 마찬가지로 클리퍼 카드로도 지불할 수 있다). 소살리토가 작은 섬이라 그런지, 샌프란시스코에 자전거 길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배에 자전거를 싣고 타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배에서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은 예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눈부시게 아름답다.
§배에서 바라본 샌프란시스코의 풍경. 6월이라도 내가 사는 애틀랜타는 벌써 숨이 막히게 더운데 이곳은 여전히 선선한 봄 날씨라 오래간만에 시원함을 만끽했다.
소살리토에 도착하자 언덕을 빼곡히 메운 예쁜 집들이 나를 맞이했다. 어떤 사람들은 소살리토가 오스트리아의 호숫가 마을인 할슈타트를 닮았다고 하는데, 두 곳을 모두 본 내 생각으로는 딱 바닷가의 언덕 쪽만 할슈타트와 비슷하지 섬 전체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그래도 돌담길을 따라 바닷가를 걷는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섬을 걷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전거를 렌털해 왔으면 하고 약간 후회했지만,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고 금문교를 건널 계획이었기에 아쉬움은 접고 다음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바닷가의 식당에서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금문교에서 일몰을 보기 위해 늦지 않게 버스에 올라탔다.
§소살리토의 바닷가 산책로. 이런 예쁜 풍경이 할슈타트와 닮았다고 하는 듯하다.
적잖은 사람들이 골든 게이트 다리가 금색이 아니라 빨간 색인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고 하는데, 실은 다리의 이름은 색과는 상관이 없고 샌프란시스코 해협이 이스탄불의 골든 혼을 닮아 골든 게이트 해협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에서 유래한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푸른 바다와 대조를 이루는 선명한 붉은 다리가 무척 아름답다.버스가 정차하는 골든 게이트 뷰 포인트에서는 각도상 다리의 모습을 제대로 조망하기 어려워 나는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걸어 마샬 해변에서 아름다운 골든 게이트 다리를 배경으로 석양을 보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하필 구름이 해가 있는 쪽에만 두텁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희망을 품고 바닷가까지 한참을 걸어갔지만 마지막까지 구름은 걷히지 않아 붉게 물든 하늘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고요한 바닷가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있는 그대로 행복하다. 하늘이 붉던 푸르던, 짙은 잿빛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데.
§마샬 비치에서 바라본 골든 게이트 다리와 해질 무렵의 바닷가. 하늘은 이대로 그냥 어둠에 묻혀갔지만 있는 그대로 아름다웠다. 자연이 으레 그렇듯이.
해가 완전히 사라진 후 호텔로 돌아오면서 비싼 케이블카를 또 탈 수가 없어 샌프란시스코의 높은 언덕을 느릿느릿 걸어 올라갔다. 조명을 밝힌 유니언 스퀘어가 새삼 예뻐 보이고 주렁주렁 매달린 케이블도 정신 사납기는커녕 정겹기만 하다. 그새 이 동화처럼 사랑스러운 바닷가 도시가 좋아진 모양이다. 언덕을 오르느라 숨은 가빠오지만 얼굴에서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음껏 행복해도 좋은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루가 조금씩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