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애틀랜타에서 동쪽을 향해 차로 4시간 정도를 달리면 조지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서배너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애틀랜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이기도 하고 3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도시이기에 끊임없이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연휴라 서배너에 오기는 했지만 사실 도시 자체에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찰스턴과 비교해 서배너는 볼품없다는 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도시에 들어서니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유럽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벽돌이 깔린 길을 보면 영락없이 유럽 한 복판 같은데 그 위로 늘어진 우거진 나무들과 스패니시모스가 어우러져 아주 독특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들은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 못해 하나같이 낡고 빛이 바랬는데 그게 더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어 도시의 매력을 더한다.
§ 1700년대 후반에 건설된 서배너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무역항으로 발전했고 애틀랜타에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조지아주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서배너 강을 따라 유럽풍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손질되지 않은 거칠고 낡은 건물이 이 도시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 서배너에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바로 사진발이 너무 안 받는다는 것이다. 1773년에 오글리소프라는 장군이 건설한 이 도시는 철저하게 계산된 계획도시로 사각형으로 구획된 도시 곳곳에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광장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 덕분에 시민들이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배너만의 독특한 분위기까지 만들어 낸 것 까지는 좋은데, 이 이국적인 분위기의 일등공신인 나무들로 인해 사진을 찍으면 온통 어둡게 나와서 나무와 어우러진 이 도시만의 매력적인 풍경을 담아내기가 너무 어렵다. 이 불만스러움의 원인은 물론 형편없는 내 사진 실력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진이라는 2차원의 매체에 이 도시의 감성까지 담고 싶다는 나의 가당찮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서배너에는 스물네 개의 광장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오글리소프 같은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있고 그 주위로 초록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아름다운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한편 나무에 착생하는 스패니시모스는 북미 대륙의 남동부에 널리 분포하고 있기에 서배너나 찰스턴 같은 남부지역에 가면 오래된 나뭇가지들 마다 스패니시모스가 늘어져 있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굉장들 중 하나인 치페와 광장(Chippewa Square)에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버스정류장 장면에 나왔던 벤치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진 탓에 광장에서는 볼 수 없다. 우리는 마침 치페와 광장 근처에 주차를 해서 한참 광장의 나무 그늘 안을 거닐다가 어두컴컴한 사진에 좌절한 후 햇살이 따사로운 서배너의 거리로 나왔다. 서배너의 역사 지구(Historic District)는 오래된 도시가 으레 그렇듯 건물마다 주차장이 딸려 있지는 않아서 근처의 공공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돌아봐야 한다. 다행히 공공 주차장이 넉넉하고 주차 요금도 크게 비싸지 않은 데다 도시도 작아서 천천히 걸으며 도시의 분위기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물론 도시 곳곳을 순회하는 마차나 트롤리, 또는 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더 편하게 관광을 즐길 수도 있다.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는 아직 2월임에도 한국의 5월처럼 따듯해서 도시를 걷기에 좋은 날씨였기에 느긋하게 걸으며 도시를 돌아보는 쪽을 택했다.
§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처럼 서배너에도 도시 중심에 커다란 교회나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먼 곳에서 보면 교회의 높은 첨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편 서배너 강 건너편에는 호텔과 컨벤션 센터 같은 현대적인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역사 지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들어서 있는 호텔들.
햇살이 가득한 서배너 강가에는 화가들이나 수공예품을 파는 상인들이 관광객들의 눈을 유혹한다. 나는 강가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달달한 군것질 거리를 사서 우물 거리기도 하고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거리를 걸었다. 들어서는 골목마다 비슷비슷한 풍경인데도 볼 때마다 새롭게 반해서 당장 사랑 고백이라도 할 사람처럼 홀린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다리도 아프고 허기도 져서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해가 졌다. 우리는 완전히 어두워 지기 전의 강가 풍경을 보고 싶어 서둘러 서배너 강으로 향했다. 밤이 되어 조용히 불을 밝힌 서배너의 거리에는 대낮의 활기 대신 은근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잔잔한 강물에 일렁이는 은은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왜 서배너를 여유를 즐기는 우아한 노부인에 비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건물은 낡고 빛 바랬어도 서배너에는 시간의 가혹한 낫이 미처 베어가지 못한 고상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녹아있다. 한때 자랑했던 미모는 세월과 함께 사라졌어도 기품은 잃지 않은 이 도시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어둠이 내려앉은 서배너 강에는 평온함이 감돈다. 강가에 늘어선 레스토랑이나 루프탑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칵테일을 즐기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나는 서배너가 너무 좋아서 꼭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오늘 즐기지 못한 칵테일과 그보다 더 달콤할 서배너의 밤공기를 마음껏 음미해 보리라.
나는 본디 화려한 도시보다 시골이나 꾸밈없는 소도시를 좋아한다. 때문에 세련되지는 않아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서배너에 마음을 뺏겨 버린 것은 이곳에 오기로 한 순간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차로 30분 거리에 해변이 있고, 고즈넉한 골목마다 역사가 담겨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고 - 미국 남부 음식은 차차 소개할 예정이다. 진.짜. 맛있다 -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서배너에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 앞에 우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이기에 운명에 이끌리듯 이곳을 다시 찾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서배너를 한적한 시골 도시로 묘사했지만 사실 서배너에는 즐길 거리가 넘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가 일했던 식당 <Devi's Restaurant>과 줄리아 로버츠의 영화 <사랑 게임>에 나오는 펍 <Six Pence>도 서배너에 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중 하나가 이 곳에 있는 만큼 밤에는 으스스한 고스트 투어를 즐길 수도 있다. 고스트 투어 중에 실제로 유령을 느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후기도 있으니 담력이 있다면 체험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그 외에도 미술관과 역사 박물관, 금지된 것 들의 박물관(American Prohibition Museum) 등 이색적인 볼거리도 많으니 서배너가 오래되고 지루한 도시라는 편견을 버리고 한 번쯤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