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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n 09. 2022

화려한 건물이 없어도 있는 그대로 빛나기를

워싱턴 DC와 내셔널 몰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 DC에 도착해 호텔로 가기 위해 다시 덜컹이는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워싱턴의 지하철 역은 무척 깨끗하고 쾌적했는데 무엇보다 로마의 판테온 천정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플랫폼 디자인이 무척 시원스럽게 보였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휴식을 취한 후, 다음 날 아침 <링컨 메모리얼>과 <워싱턴 모뉴먼트> 등 워싱턴 내 주요 관광지가 밀집되어있는 <내셔널 몰>로 향했다. 먼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링컨 메모리얼>을 찾았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링컨 기념관에 들어서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인 링컨의 석조상이 위엄 있게 워싱턴을 내려다보고 있다. 링컨 메모리얼 계단에 서면 호수를 앞에 두고 저 멀리 <워싱턴 모뉴먼트>와 국회 의사당이 한눈에 들어와 외국인 관광객인 나는 너무 감동스러운데,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사적지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는지 그저 웃고 떠들고 춤추느라 정신이 없다. 내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면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이해도 가고 귀엽기도 해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아브라함 링컨의 석조상과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본 링컨 메모리얼의 전경. 워싱턴 DC에는 지금껏 본 학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수학여행 학생들이 있어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사적지도 많고 박물관도 많아 학생들에게는 공부가 될 만한 곳이니 당연하지만, 본디 수학여행의 본질은 노는 데에 있으니 학생들은 대체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링컨 메모리얼> 맞은편으로 그 유명한 <워싱턴 메모리얼>이 있다. 로마에서 보았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정도의 크기를 생각했는데 모양만 똑같을 뿐 이 모뉴먼트는 워낙 거대해서 고개만 돌리면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일 정도이다. 멋지기는 한데 너무 거대하고 멀끔한 나머지 묘하게 이질적이어서, 뭔가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컨택트>의 외계인 우주선이 연상되었다. 모뉴먼트 주변을 둥글게 한 바퀴 돌아보며 이 모뉴먼트도 2천 년쯤 지나면 세월에 바래고 주변 건물들에 비해 아담해 보여 좀 더 풍경에 녹아들어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피라미드도 처음에는 모두 대리석이 입혀져 있었다고 하니 4천 년 전 건축 당시에는 무척 이질적으로 보였을 테고, 애당초 그 이질감조차 특권층에 대한 경외심을 노린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거대한 워싱턴 모뉴먼트의 규모도 이해가 갔다. 아무렴, 세계 만국에 위대한 나라 미국의 국력을 과시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 세계 최대의 석조 오벨리스크라는 워싱턴 모뉴먼트는 가까이서 봐도 웅장하고 멋지지만 오른쪽 사진처럼 <링컨 메모리얼>에서 호수에 반사된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오른쪽 사진은 해질 무렵에 찍은 것으로 여기가 워싱턴 DC의 일몰 포인트라고 한다. 한편 모뉴먼트의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는데 물론 여기도 Recreation.gov 에서 사전에 입장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한편 <링컨 메모리얼>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이번에는 판테온을 그대로 베껴 놓은 듯한 느낌의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이 나타난다. 판테온과 달리 천정이 막혀 있다는 것만 빼면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지하철 플랫폼도 모두 이 콘셉트로 통일시킨 모양이다. 이쯤 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뚝 떼어온 듯한 모뉴먼트까지 집착에 가까울 만큼 다른 문화를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했을 때 어떤 미국인은 차이나타운의 건물들이 중국을 닮은 것처럼 그저 이민 온 사람들이 자기가 살던 곳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유럽식으로 보이는 것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민자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오지는 않았으므로 그 설명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초기 미국 도시들이 유럽풍으로 보이는 데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있겠지만.


§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 이곳 역시 워싱턴 DC 역시 일몰 포인트 중 한 곳이다. 제퍼슨 동상 위로 판테온의 상징적인 사각형 천정이 보이는데 워싱턴 DC의 모든 지하철 플랫폼 천정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고대 유물을 고스란히 베낀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이집트나 로마처럼 명실상부한 세계의 패권 국가로서의 자본과 권력을 과시하는 한편, 그들의 뒤를 이어 미국이 현대 문명의 원류가 되고자 하는 포부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사실 고전 건축을 모방하는 것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서양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로마의 신전을 모델로 본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의 기념관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경의로 느껴져 충분히 납득이 가기도 한다. 다만 의문인 것은 현대 미국이 정말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다양성을 꼽는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일어나는 백래시 현상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여전한 혐오 범죄와 총기 사고로 아이들이 죽어가도 돈의 논리에 좌우되어 규제하지 못하는 현실 역시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 고귀한 정신을 살렸다면 무엇을 베껴왔든 이해가 갈 텐데, 정신은 간데없고 화려한 건물들만 모셔왔으니 그 간극에서 자꾸 아이러니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아까 느꼈던 이질감은 어쩌면 이 괴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국이 여러 면에서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미국이 이 건물들에 어울리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우뚝 솟은 모뉴먼트나 거대한 기념관이 없어도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나는 미국이 지금보다 더 나아졌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을, 그리고 언젠가 한국이 이곳보다 훨씬 더 좋아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품으며 워싱턴 DC의 아름답지만 묘하게 이질적인 밤거리를 지나 호텔로 돌아왔다.


§ 워싱턴 DC의 밤 풍경. 조명을 받은 각종 기념관들과 모뉴먼트가 호수에 반사돼 무척 아름답다. 밤의 내셔널 몰을 걷는 기분이 무척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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