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하면 뮤지컬 <시카고>의 인상이 하도 강한 탓인지 화려한 네온사인 너머 뒷골목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밤이 되면 범죄자들이 활개를 치는 무법천지일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시카고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임에도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었다. 아마 친구가 근처에 살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시카고의 거리는 너무 깨끗하고 세련된 데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예뻐서 여기를 왜 이제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굳이 따지자면 깔끔한 버전의 뉴욕인데 센트럴파크와 허드슨 강 대신 미시간 호수와 운하를 품고 있다는 점 정도가 차이일까? 물론 크기는 뉴욕보다 작지만 뉴욕의 규모에 비례하는 엄청난 수의 관광객을 생각하면 차라리 작고 한산한 시카고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 Bataan-Corregidor Memorial Bridge에서 바라본 시카고 전경. 여기서 시카고의 주요 건물을 대부분 볼 수 있다.
오늘도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운하의 물이 옅은 청록색으로 아름답게 흐른다. 아무리 북쪽이래도 여름은 여름이라 햇볕 아래에서는 제법 더운데 그 때문인지 운하에서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도 약간 마음이 흔들렸으나 눈앞에서 카약 조종이 서툰 관광객이 홀랑 물에 빠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여벌의 옷도 챙겨 오지 않았는데 잘못 물에 빠지기라도 했다가는 남은 하루를 젖은 생쥐꼴로 다녀야 할 형편이니 마음 간다고 무작정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운하 옆을 따라 걷다가 더위에 지치면 그늘에 앉아 쉬며 사람 구경도 했다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카고의 건물들을 보기 좋은 Bataan-Corregidor 다리에서 두어 블록을 내려가면 유명한 시카고 극장이 있다. 나는 극장 앞에서 관광객 티를 있는 대로 내며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뮤지컬 때문인지 시카고 극장의 간판이 빨간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오렌지색에 더 가까웠다. 밤에 보면 더 화려했을까?
다음 목적지는 링컨 공원인데 날씨가 어찌나 더운지 그늘 없는 공원을 한낮에 걸으려니 한 블록을 가는데도 하세월이다. 어제 친구 차로 얼마나 호강을 하고 다녔는지 뒤늦게 깨닫고 나니 새삼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솟을 지경이었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아무렇게 주저앉아 눈물 대신 땀만 바가지로 쏟아내다가, 급한 대로 근처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 흠뻑 맞으며 기운을 차렸다. 몸이 충분히 식은 후 박물관에서 나와 미시간 호숫가의 네이비 피어로 이동했다. 사실 어젯밤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불꽃놀이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부랴부랴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때는 불꽃놀이에 정신이 팔린 데다 주변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는데 낮에 보는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숨 막히는 시카고 풍경의 팔 할은 미시간 호수에 있으니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자연만 한 것이 없다.
§네이비 피어에서 바라본 시카고 전경. 푸른 호수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그 너머로 보이는 빌딩 숲이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린다.
네이비 피어에서 기분 좋은 호숫가 바람을 즐기다 조금 이른 저녁을 마친 후 선셋 크루즈를 타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시간에 좀 여유가 있어 전망이 좋다는 시카고 애플 스토어에서 괜히 사지도 않을 기계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넓은 창으로 운하를 구경하기도 하다가 시간에 맞추어 배에 올라탔다. 시카고는 여러 크루즈가 다니는데 운하를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가며 주위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듣는 Architecture Cruise가 가장 인기가 많다. 하지만 설명을 알아들을 자신이 없기도 하고, 여름에는 많이 더워서 낮에 배를 타는 것은 힘들다는 평도 많아 그냥 선셋 크루즈를 택했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쯤 출항해서 운하를 따라 내려가던 배는 네이비 피어 근처의 호수 어귀에서 잠시 멈춰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배 위에서 바라본 시카고 전경. 사진 오른쪽에 네이비 피어가 있다. 여기가 운하와 호수가 만나는 곳.
서쪽 하늘이 좀 더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배는 속도를 내어 미시간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배가 빨라질수록 시카고 도심의 풍경이 그림처럼 멀어져 갔다. 조금 더 어두워지면 건물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혀 보석처럼 화려해질 테지만, 아직은 그저 석양에 몸을 맡기고 검붉게 물들어 가는 도시가 어쩐지 평화로워 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카고를 모함한 영화들이 원망스러워지려는찰나, 작년에 여기서 총기 사고로 죽은 사람만 천 명이 넘는다는 친구의 얘기가 떠올랐다. 물론 관광객이 다니는 다운타운은 안전하지만 그 밖의 지역은 매우 위험해서, 개중에는 미국 군의관들이 수련하러 오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총상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뜻이니 도시의 아름다움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에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졌다. 예쁜 곳에 예쁜 일들만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니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노을마저 울적해 보이는 기분이다.
§낮에는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밤이 되자 흐려져 새빨간 노을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호수 반대편 미시간 주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밤새 정전으로 고생했다는 모양이다. 이제 구름 정도는 귀여운 애교로 넘어가 줘야겠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배는 화려한 밤의 시카고를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불빛들이 재잘대는 밤의 시카고에 고요가 찾아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빌딩 사이 보도블록 위를 타박타박 걸으며 이 다운타운 밖에 사는 사람들도 걱정 없이 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랐다.그저 창밖으로 바라만 보기엔 밤공기는 너무 달콤하고 낭만적이기에. 언젠가 시카고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울려 퍼지는 세레나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도시와 꼭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랑 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