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버킷 리스트처럼 미국에 있는 동안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디즈니월드에 가는 것이다. 이 나이에 중년 부부 둘이서 디즈니월드를 가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디즈니월드에는 아이들 못지않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도 많다는 얘기에 용기를 얻어 주말에 짬을 내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디즈니월드 매직킹덤 주차장에서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있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디즈니 아이템을 하나씩 장착하고 들뜬 표정으로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몇 년 전 도쿄 디즈니 씨(Disney Sea)에서 사 온 미니마우스 머리띠와 문어 모자 - 만화 인어공주의 캐릭터인 세바스찬 얼굴의 모자로, 이상하게도 세바스찬은 바닷가재인데 모자는 문어 모양이다 - 로 무장을 하고 손님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디즈니월드 매직킹덤은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페리나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페리에서 보는 매직킹덤의 뷰가 예쁘다고 해서 페리를 탔는데 전망 좋은 자리에는 고등학생 단체 여행객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는 뒤에 물러서 있었다. 페리 보트가 매직킹덤을 향해 천천히다가가자 멀리서 신데렐라 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보자 괜히 들떠와서 동심에빠져드려는 찰나, 주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통에 감상에 젖지도 못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박수만 쳐댔다. 오늘 꿈을 이룬 사람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 올랜도 디즈니월드는 매직킹덤, 애니멀킹덤, 할리우드 스튜디오, 앱캇 네 개의 테마파크로 이루어져 있어 다 가려면 나흘이 걸린다. 우리는 체력이 부족해서 두 곳만 가기로 했고 첫날 매직킹덤을 찾았다. 호수에 비친 신데렐라 성의 측면 모습. 정면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
놀이기구 중 가장 인기가 있는 <Seven Dwarves Mine Train>은 입장과 동시에 이미 예약이 마감되어 대신 <Space Mountain>을 예약해 놓고 남는 시간 동안 그나마 줄이 짧은 <Under the Sea>나 <It's a Small World> 같은 아기자기한 놀이기구를 타며 놀았다.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하는 나에게 딱 맞는 아동 수준의 놀이기구 들인데 인형들이 귀엽고 디테일이 훌륭해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인형들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Pirates of Caribbean>을 탔을 때는 조니 뎁의 인형을 본 남편이 사람이 아니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기도 했다. 한편 예약시간에 맞춰 <Space Mountain>을 타러 갔는데 알고 보니 이 놀이기구가 매직킹덤에서 가장 무서운 롤러코스터였던 모양이다. 실내 롤러코스터라 레일이 안 보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탄 나는 졸지에 봉변을 당하는 바람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느라 목은 다 쉬어 버리고 선글라스까지 잃어버리는 데미지를 입고 너덜너덜해져서 내려야 했다.
§인어공주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Under the Sea>의 인형들.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나는 신이 났지만 남편은 지루해했다. 한편 강력한 비주얼로 매직킹덤 직원들과 아이들의 주목을 끈 세바스찬 문어 모자.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이 불꽃놀이 관람 포인트라 저녁 7시쯤 되면 모두들 이곳으로 모인다.
여러 가지 놀이기구를 타면서 알찬 하루를 보낸 우리는 불꽃놀이 시작 전 자리를 잡기 위해 한 시간 정도 먼저 미키마우스 동상 근처로 찾아갔다. 일찍 갔다고 생각했는데 동상 근처에는 이미 사람이 가득했다. 매직킹덤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두 가지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라는데, 퍼레이드는 코로나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라 모두들 불꽃놀이를 제대로 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품고 모여든 듯했다. 여덟 시가 되자 웅장한 사운드의 음악과 함께 약 20분간 환상적인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익숙한 디즈니의 테마 음악과 레이저로 재현된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신데렐라 성 위로 끊임없이 쏘아 올려지는 황홀한 불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관객을 압도했다. 나는 이 마법 같은 풍경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울컥했다.
§해질 무렵의 신데렐라 성과 성을 배경으로화려하게 불꽃이 터지는 풍경. 'You are the magic'이라는 노랫말의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는데 나는 이 불꽃놀이야 말로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불꽃놀이가 너무 압도적이라 쇼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놀이기구를 하나도 안 타도 불꽃놀이 하나 만으로도 이곳에 올 가치가 있다.
놀이동산에 오면 나이를 잊는다. 동화 같은 풍경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캐릭터들 때문인지, 혹은 피터팬 신드롬이 아니라 해도 누구나 가끔은 의무감이나 사회적 기대치를 다 잊고 어린 시절로 마음껏 돌아갈 수 있는 일탈의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놀이동산에서는 평소에 하지 못했던 우스꽝스러운 모자도 써보고 유치한 놀이기구도 신나게 탄다. 이게 매직킹덤이 지닌 마법의 힘인가 보다. 그래서 생각했다. 디즈니월드에 가기 좋은 나이란 건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금이라고. 나이와 상관 없이 꿈꿀 수 있다면, 설렐수 있다면, 즐길 수 있다면 그 나이가 딱 좋은 나이가 아닐까. 나는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60살 할머니가 되어도 놀이동산에서 미키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6살의마음으로 놀기로 마음먹었다. 몇 살이 되었든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고 외치며 디즈니월드에 갈 수 있는 세상 힙한 할매로 늙어가겠다고 다짐하며 마법이 채 사라지지 않은 디즈니월드를 뒤로 한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저나 먼 훗날 이곳을 다시 찾을 그때까지내 두 다리가 튼튼하게 버텨 주기를. 놀이동산은 다리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