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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Sep 16. 2022

지금 꽃길을 거닐어요, 봄날은 가니까

애슈빌, 빌트모어 저택

내슈빌에서 동쪽으로 5시간쯤 달리면 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州都)인 애슈빌이 나타난다. 주도라고는 해도 규모가 크지 않고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어서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애슈빌 하면 다를 꼭 봐야 할 곳으로 꼽는 대표적인 명소가 있으니 밴더빌트 가문의 마지막 유산인 <빌트모어 저택>이다. 밴더빌트 가문은 미국의 철도왕이자 선박왕으로, 한때 록펠러와 카네기와 함께 미국 3대 부호로 꼽히는 대단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어처구니 없게도 3대 만에 몰락해 버렸는데, 딱히 슬픈 사연 같은 것은 없고 그냥 후손들이 흥청망청 쓰다가 재산을 다 날려 먹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저택 하나는 남아 있어 그 옛날 밴더빌트 가문의 영화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다.


§ 동화 속 궁전처럼 보이는 거대한 빌트모어 저택의 전경. 내가 본 개인 소유의 저택 중 여기가 가장 크고 화려했다.


침실만 33개라는 빌트모어 저택은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내부 장식이며 가구들도 유럽의 왕족 못지않게 신경을 쓴 듯 우아함을 자랑한다. 지금은 고풍스럽게 느껴지지만 건축 당시만 해도 현대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는데, 저택 안에 당구장은 물론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거대한 실내 수영장과 볼링장까지 같이 갖추고 있을 정도이다. 2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에 이 정도 시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택을 돌아볼수록 입이 절로 벌어진다. 한편, 저택에는 모네나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다수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아직 이 화가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신진 작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작품들을 여러 점 구입했다고 한다. 이 화가들이 지금은 모두 거장이 되었으니 밴더빌트 가문 사람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심미안만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 빌트모어 저택의 내부 전경. 만찬홀과 서재, 응접실 등이다.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이 저택은 좌우로 남녀 손님들의 침실을 나눠 놓아 개인 공간에서는 서로 마주치지 않게 배려했다.


저택 밖으로 나서면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워낙 넓어 다 둘러보기가 어려운 탓에 나는 가까이 식물원 근처의 정원만 돌아보았다. 정원에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꽃들이 만개해 있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봄날로 되돌아온 듯하다. 날씨가 조금만 더 선선했다면 하루 종일 정원에 머물고 싶었는데, 풍경은 봄날이어도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영락없는 여름이라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늘로 피해야 했다. 나는 무더위 속에서도 간간이 불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살랑이는 꽃들 사이를 거닐었다. 저택을 처음 짓기 시작한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정작 제대로 된 호사도 누려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눈을 감는 그 순간 자신이 피땀 흘려 이룩한 자산이 불과 3대 만에 물거품처럼 사라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가문의 몰락을 예견했다면 이 저택을 짓는데 이토록 공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도 오늘의 나처럼 꽃들 사이를 거닐며 남은 생을 평화롭게 보내지 않았을까. 지금 손에 쥔 것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 꽃들이 가득해 사랑스러운 정원. 일 년 내내 봄만 계속될 것 같은 낭만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밴더빌트 가문의 재산처럼 이 꽃들도 언젠가 모두 사라질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꽃은 피었을 때 보아야 한다. 봄날은 가니까.


한편, 빌트모어 저택의 입장권을 구입하면 인근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시음을 할 수 있다. 조지아 북쪽이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괜찮은 와이너리가 여럿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언젠가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저택에 와이너리가 딸려 있으니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와이너리도 빌트모어 저택 못지않게 예쁘게 꾸며져 있어 소노마에서 가보았던 곳보다 훨씬 눈이 즐겁다. 다만 와인에 대해서는 워낙 문외한이라 어느 곳이 나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것저것 시음해 본 후 달콤한 샤냉 블랑을 한 병 사서 나왔다. 와이너리뿐 아니라 저택에 딸린 기념품 가게들도 하나같이 근사한 물건들로 가득해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특히 귀여운 핼러윈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며칠 전 이웃 리즈가 핼러윈 장식을 시작한다는 말에 '아직 8월 말인데 벌써?'하고 생각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핼러윈 분위기를 내는 모양이다. 혹은 여름에 지친 이들의 이른 가을맞이인가 싶기도 하고.


§ 빌트모어 저택에 딸린 와이너리. 와인 시음이 가능할 뿐 아니라 각종 귀여운 소품들도 판매하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와인너리 구경까지 모두 마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애슈빌을 떠나기 전 지인이 추천한  <Grove Park Inn>에 들러 저녁식사를 했다. 이 호텔의 <Sunset Terrace> 식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정말 눈앞에 애팔래치안 산맥이 겹겹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식사도 아주 훌륭해서 마지막 한 입까지 싹싹 긁어먹고도 아쉬울 정도이다. 우리는 눈도 입도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나서기로 했다. 강원도의 산길을 닮은 구불구불한 노스캐롤라이나의 길을 달리며 늦여름의 즐거운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 애슈빌의 <Grove Park Inn> 호텔에는 식당이 여럿 있어 취향껏 가면 되는데 <Sunset Terrace> 레스토랑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테라스가 서쪽을 정면으로 향해 있어 일몰 시간에 맞추어 가면 더 근사한 풍경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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