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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Oct 19. 2022

오래도록 낡지 않을 사랑을 위해

1000개의 섬과 볼트 성

몇 년 전 캄보디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힌두교 사원에 대해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익숙지 않은 종교인 데다 짧은 여행이었던 터라 기껏 배워간 보람도 없이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사원의 구조부터 디테일한 장식까지 힌두교 사상을 충실히 담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힌두교뿐 아니라 유럽의 성당들과 불교 사찰들 역시 건축물에 각자의 교리와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건물을 지을 때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랑꾼들은 아내를 향한 사랑을 담아 아름다운 궁전 형태의 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근사한 저택을 짓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벽돌을 쌓아 올리는 작업이 사랑이라는 무형의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눈물의 성이라고도 불리는 싸우전드 아일랜드 제도의 볼트 성을 찾았다. 싸우전드 아일랜드 제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 싸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이 유래한 곳으로 이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 지어졌다. 한국에서는 천(1000) 섬이라고도 불린다 - , 그중 하나인 하트섬을 소유한 조지 볼트가 아내를 위해 지은 성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을 건축하는 도중에 아내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상심한 볼트는 공사를 중단한 채 섬을 방치했기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뉴욕주 정부가 관광 목적으로 섬을 매입할 때까지 황폐한 상태로 있었다. 지금은 공사가 중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잘 정비되어 있고 외관도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아름다운 데다 로맨틱하고 슬픈 사연까지 얽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위에서부터 차례로 배 위에서 바라본 볼트 섬의 전경과 메인 빌딩, 아내의 사망으로 도중에 공사가 중단된 별채


볼트 성을 가기 위해서는 캐나다의 킹스턴에서 유람선을 타고 싸우전드 아일랜드를 쭉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하트섬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트섬은 미국 소유이기 때문에 국경을 통과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미국의 알렉산드리아 베이에서 가는 것인데 섬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고 국경을 통과하지 않아도 돼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지만 싸우전드 아일랜드의 다른 섬들을 충분히 돌아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10월에는 캐나다에서 하트섬으로 가는 배가 주말에만 운행하기에 나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알렉산드리아 베이에서 가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나 볼트 성 자체가 10월 10일까지만 오픈을 하기에 아슬아슬 올해 영업 종료 직전에 가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성의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과 싸우전드 아일랜드. 싸우전드 아일랜드 제도는 셀 수 없이 많은 자그마한 섬들이 동동 떠있어 무척 아름다운데 높은 곳에서 보아야 전경을 한눈에 즐길 수 있다. 때문에 킹스턴에서 배를 타지 못한 대신 전망대에서 풍경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전망대 운영시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란다. 근로자에게는 천국 같은 직장이겠으나 관광객에게는 너무 가혹하고 박한 처사이다. 결국 시간이 늦어 전망대에는 오르지 못하고 캐나다와 미국을 잇는 다리를 오가며 본 풍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트섬은 위에서 보면 심장을 꼭 닮은 형태를 하고 있어서 사랑을 담기에 더욱 어울리는 듯도 하다. 배가 섬을 한 바퀴 돌며 다가가자 아름다운 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그마한 섬을 뒤덮은 나무들은 이미 단풍이 시작되어 울긋불긋한데, 그 사이로 볼트 성의 메인 건물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리고 섬 한편에 별채처럼 자리한 성은 바로 바다와 닿아있어 마치 만화 인어공주에 나오는 바닷가 성처럼 보인다. 만화 인어공주의 배경인 성은 프랑스의 시옹성을 모델로 했다는데, 사진을 살펴보니 지붕 부분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성도 어느 만화나 영화의 배경이 될지도 모를 일이니 잘 봐 두어야겠다. 물롤 이미 가지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기에 또 다른 스토리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스크린으로 보는 풍경은 또 색다를 테니 살짝 기대를 품어봐도 좋지 않을까.  


§ 하트섬의 정원과 볼트 성 외관은 무척 아름다운데 반해 내부는 빌트모어 저택이나 다른 화려한 저택들에 비하면 수수한 편이다. 왼쪽 아래는 조지 볼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루이스 볼트의 초상화


아침에는 잔뜩 흐렸던 하늘이 섬에 도착하자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눈부신 햇살 아래 붉은 나뭇잎들은 더욱 선명하고, 수면은 더 찬란하게 반짝인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밀려가고, 그 아래서는 나뭇잎들이 서로 격렬하게 몸을 부딪히며 파도와 닮은 소리를 냈다. 몇 주 후면 앙상해지겠지만 아직은 무성한 잎사귀를 뽐내고 싶은가 보다. 나는 꿈속의 풍경 같은 정원을 걸으며 무엇에 사랑을 담으면 영원할까 생각했다. 조지 볼트의 성은 무척 낭만적인 선물이지만 저승사자로부터 아내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사실 무엇에 담든 사랑을 영원히 머물게 하는 방법은 없다. 그래도 볼트 덕분에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그들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으니, 어쩌면 건축물에 사랑을 담겠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누군가가 이 성을 찾아와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의 사랑은 언제까지고 현재일테니. 이 벽돌에도, 이 계단에도, 이 햇살 가득한 정원 구석구석에도 그들의 사랑은 불멸의 존재로 남아있다. 나는 손을 뻗어 낡은 성의 벽을 어루만지며, 그 안에 담긴 조금도 낡지 않은 사랑에 경의를 표한 후 섬을 떠났다.


§ 가을이 일찌감치 찾아온 싸우전드 아일랜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낡은 성에 숨을 불어넣어 되살려 놓은 듯하다. 색채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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