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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Feb 28. 2022

곱게 차려입은 예쁘장한 소녀처럼

솜사탕 같은 도시 찰스턴에서

서배너 강을 건너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도시  찰스턴의 풍경은 서배너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찰스턴과 서배너를 비교하는데 두 도시가 가깝기도 하고 두 도시 모두 항구를 두고 발달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 - 찰스턴은 미국의 여덟 번째, 서배너는 열세 번째 도시이다 - 이기에 식민지 시대의 유럽풍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찰스턴은 서배너보다 좀 더 크기도 하고 거리가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이곳에서 많은 영화들이 촬영되었는데, 그중 <노트북>이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앞서 기억을 되살리고자 <노트북>을 다시 한번 봤는데 레이철 맥아담스의 상큼한 미소에 정신이 팔려 찰스턴의 거리 풍경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실제로 찰스턴에 와보니 <노트북>보다 독특한 색감으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 페인트를 말끔하게 칠한 유럽식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니 달콤한 솜사탕 맛이 입 안에 퍼지는 듯하다.


§ 서배너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거리마다 유럽식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애써 낡은 흔적을 감추지 않은 서배너와는 달리 찰스턴의 건물들은 예쁘게 손질되어 있어 두 도시의 풍경이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이 부분에서 두 도시의 선호도가 가장 많이 갈리는 것 같다. 동화처럼 예쁜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찰스턴이 더 좋다고 하고,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서배너가 낫다고 한다. 나는 후자 쪽.


찰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인 <레인보우 로우>가 예쁜 건물을 보기에 가장 좋은데 각 건물들마다 한껏 꾸미고 온 소녀들이 다양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레인보우 로우를 지나 워터 프런트 공원으로 가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는데 은근히 바람이 차서 바닷가를 산책하니 금세 으슬으슬 추워져 오래 걷지는 못하고 다시 건물들 사이로 돌아와 거리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어제만 해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더웠는데 하루 사이에 수은주가 뚝 떨어져서 당황하는 한편 머나먼 미국 땅에도 꽃샘추위가 있나 보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봄은 쉽게 오지 않는 모양이다. 다행히 건물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찰스턴 시내는 바닷가보다 한결 따듯하다. 오래된 도시는 그저 골목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기만 해도 즐겁다.


§ 영화 노트북에서 노아와 앨리가 첫 데이트를 한 장소인 <American Theater>가 그대로 남아있다. 서배너와 찰스턴의 풍경이 다른 두 번째 이유는 이곳에는 도시를 뒤덮은 스패니시모스가 없다는 것. 애초에 큰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인지 도시 정비를 하면서 큰 나무들은 베어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스패니시모스가 주렁주렁 늘어진 참나무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반해 찰스턴 도시 안에서는 드문드문 보이는 야자수 외에 아름드리나무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찰스턴은 오래된 도시인만큼 도시 곳곳에 재력가나 유명인사의 저택이 남아 있어 박물관처럼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모든 박물관을 다 갈 수는 없어서 나는 <나다니엘 러셀 하우스>만 들어갔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러셀이 1808년에 건축한 집은 타원형 계단이 유명한데 막혀 있어서 계단을 오를 수는 없다. 식당과 거실, 침실 모두 고급스러운 가구와 집기로 채워져 있어서 당시 재력가들의 화려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박물관 티켓을 구입하면 오디오 가이드를 함께 대여해 주기 때문에 건축 양식이나 미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들도 관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집이 크지 않은데도 박물관 관람은 역시 지치는 일이라 저택을 나올 때 즈음에는 다리가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우리는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한 후 일몰을 보러 찰스턴 건너편에 있는 설리번 섬으로 향하기로 했다.


§ 나다니엘 러셀 하우스의 외부와 내부 풍경. 위의 화려한 식당은 연회 시 사용했고 평소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는 아래 사진의 작은 식당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래의 오른쪽 사진이 유명한 나선 계단인데 관람객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직접 올라보지는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찰스턴 역시 관광지라 그런지 식당에 들어가는 것이 만만찮다. 우리가 가려던 식당에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 간신히 식사를 마친 후 일몰 시간에 맞춰 서둘러 나왔건만 설리번 섬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해가 지고 말았다. 서배너에서도 저녁을 먹느라 일몰을 놓쳤는데 찰스턴에서도 식당이 발목을 잡는다. 우리는 내일 다시 한번 일몰에 도전하기로 하고 대신 다리 위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분홍색 하늘을 만끽했다. 동쪽 하늘의 일몰은 해가 지는 풍경이 직접 보이지 않는 대신 더 풍부한 색으로 가득해 나름의 매력이 있다. 거리부터 하늘까지 완벽하게 사랑스러웠던 예쁘장한 찰스턴에서의 하루는 도시를 꼭 닮은 무지개색으로 저물어 간다.


§ 해질 무렵의 찰스턴 거리와 아서 라베널 주니어 다리 위에서 본 저녁 하늘. 마치 필터라도 사용한 것 같은 몽환적인 색감의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이 하늘에 반해 다음 날 일몰 시간에 맞춰 다시 바닷가로 나갔지만 구름이 껴서 결국 찰스턴에서는 일몰을 보지 못했다.




서배너가 우아한 노부인이라면 찰스턴은 곱게 단장한 소녀가 떠오르는 도시이다. 풍성한 패티코트와 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두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예쁘장한 꼬마 아가씨 같은 곳. 도시 전체가 지닌 여리여리한 색감 때문인지 찰스턴의 분위기는 동화 속 세상이나 잘 꾸며진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 강하다. 가까이 있고 비슷한 역사를 지닌 두 도시의 느낌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대한 미국 땅에서 멀리 가지 않고도 두 도시의 각각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할 틈 없이 구석구석이 다르고 또 아름다운 미국에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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