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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30. 2022

고색창연한 캠퍼스를 거닐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원래는 뉴욕을 거쳐 볼티모어를 들러가려 했으나 볼티모어는 이너 하버 이외의 볼 것이 마땅히 없기도 하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가 볼티모어에 있다는 말에 급히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목적지는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교가 아이비리그 대학들 중 가장 예쁘다고 하고, 기대했던 하버드 대학이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단히 인상적이지는 않았기에 다른 캠퍼스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업무 관계로 알고 지냈던 분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근무 중이라 전부터 뉴욕에 오게 되면 꼭 프린스턴에 들르라는 연락을 받았었기에, 멋모르는 관광객을 핑계 삼아 그저 인사치레임이 분명한 말을 염치없이 덥석 물어보기로 했다. 계획에 없었던지라 급히 연락을 했는데도 흔쾌히 시간을 내어 안내해 주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 뉴욕 펜실베이니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중. 첼시 마켓에서 산 팻 위치 라우니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뉴욕에서 프린스턴까지 한번에 가는 기차는 없어서 Amtrak이나 NJ Transit으로 프린스턴 정션 역까지 간 후 거기서 프린스턴 셔틀 기차로 갈아타고 가야한다. 셔틀 기차는 승객 수에 따라 한 량이나 두 량만 운행하는 귀여운 꼬꼬마 열차이다.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바글거리는 뉴욕을 벗어나 프린스턴에 도착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초록색 나무와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이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1746년에 설립된 대학이니 만큼 캠퍼스 전체가 미국이 아닌 유럽 한복판 같은 풍경인데, 설명을 들으니 본관이나 일부 건물을 제외하면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나중에 차례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다만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분위기로 만든 것이라는데 덕분에 프린스턴만의 고색창연한 느낌이 훼손되지 않은 것 같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방문한 날이 홈 커밍 데이 하루 전이라 캠퍼스 곳곳에 설치된 행사용 천막이 시야를 가려 캠퍼스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었다. 원래도 홈커밍 데이 때는 캠퍼스가 복작복작하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행사가 재개되어서 더욱 참가 신청자가 많다고 한다. 홈커밍 데이의 하이라이트는 졸업 연도 순으로 차례로 행렬을 하는 퍼레이드라는데, 처음에는 백인 남자들만 있다가 70년대쯤에 이르러 여자가 등장하고 그 후로 흑인과 아시안 등 유색인종이 차례로 등장해 이 퍼레이드만 봐도 미국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루 전에 도착해 퍼레이드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행사 당일에 왔다면 사람이 많아 그 무엇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 뻔하기에 한산하게 캠퍼스 구경을 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프린스턴 대학 본관과 인문관. 담쟁이는 원래 졸업생들이 기증했던 것으로 나무 옆에는 기증 연도가 새겨져 있다. 지인 중에 문화재 복원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는 담쟁이야말로 건축문화재의 적이라며 담쟁이를 극혐 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린스턴 대학도 담쟁이를 심을 곳도 남아있지 않은 데다 건물 안전상의 문제도 있어 더 이상 담쟁이를 심지 않는다고 한다.


담쟁이로 뒤덮인 본관 맞은편으로 대학 정문이 있는데 정문으로 다니면 학교를 4년 내에 졸업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어 학생들은 정문 옆 쪽문으로 다닌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 있어도 미신은 피할 수 없는 모양. 한편 한 때는 도서관이었고 현재는 인문관으로 사용되는 붉은색 식민지 시대 건물이 본관 바로 옆에 있는데 바로 지난주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아이젠하워>를 여기서 촬영해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왔었다고 한다.


§ 영화 <아이젠하워>를 촬영한 인문관. 우리가 갔을 때는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라 캠퍼스가 한산했는데 지난주에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보기 위해 이 좁은 곳에 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나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좋아하지만 아이언맨이 아닌 로버트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게 그는 영원한 아이언맨이다.


본관을 돌아 나와 조금 걸으면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 부속 박물관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공사 중이라 관람을 할 수는 없었다. 한편 예전에는 학교 근처에 끼니를 해결할 곳이 마땅찮았는학생들이 모두 부잣집 도련님들이라 본인들이 직접 음식을 해 먹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던 탓에 자기들끼리 각출해 요리사를 고용해 같이 식사하며 친목을 다지던 것에서 유래한 사교 클럽 <Eating Club>이 시작된 곳도 지나며 들러 보았다. 프린스턴 대학은 원래도 부자들의 학교로 유명한데, 그 안에서도 이팅 클럽의 멤버냐 아니냐로 편을 가르는 엘리트주의의 어두운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의 사옥으로 민족자결주의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 대학 출신이라 그 역시 이곳에서 살았고, 그의 딸도 여기서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캠퍼스란 어디나 시끌벅적하고 사건 사고가 많은 탓에 더 이상 여기서 총장들이 살지는 않고, 현재는 교직원들의 회식 장소나 접견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나를 안내해 주었던 분 역시 몇 년 전 여기서 회식을 했다고 하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근사한 파티 장면이 떠올라 괜스레 부러웠다.


§ 저명한 인사들이 총장으로 거쳐갔던 사옥. 건물 뒤로는 예쁜 정원이 펼쳐져 있어 파티나 만찬을 즐기기에 좋을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하게 캠퍼스 투어를 마치고 파이어스톤 도서관 투어를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나긴 역사만큼 얽힌 이야기들도 많아 그런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서관 역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겠지. 나는 들뜬 마음으로 안내해 주시는 분의 뒤를 바짝 따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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